여자친구는 세계관 영상 ‘A Tale of the Glass Bead : Previous Story’와 ‘교차로’의 뮤직비디오에서 ‘Fingertip’을 “回” 시리즈의 기반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의외의 선택으로 보였다. ‘Fingertip’은 그룹의 서사에서 가장 괴리되어있는 곡이기 때문이다. 학교 3부작에 이어 정규 1집 “LOL”까지 “파워 청순”이라 일컬어지는 시그니처 스타일을 완성한 뒤 ‘Fingertip’으로 “파워 시크”라는 표어를 내세워 “제 2막을 시작”한다 선포했지만, ‘귀를 기울이면’과 ‘여름비’로 “‘Fingertip’을 스핀오프로 한 새로운 연작 시리즈”를 기획하며 재차 기존의 노선으로 선회하고, 이후 ‘시간을 달려서’와 ‘여름비’의 서정을 단서 삼아 ‘밤’과 ‘해야’로 “격정 아련”을 표방해온 그들의 행보에서 ‘Fingertip’은 잊혀진 과거와 다름없었다.
마지막 시리즈 “回:Walpurgis Night”에 이르러 비로소 여자친구가 ‘Fingertip’을 꺼내든 저의를 읽게 된다. 타이틀곡 ‘MAGO’의 디스코는, 2020년 해외 팝 트렌드이자 빅히트가 방탄소년단 ‘Dynamite’와 투모로우바이투게더 ‘5시 53분의 하늘에서 발견한 너와 나’로 줄곧 몰두해왔던 장르이기도 하지만, ‘Fingertip’의 디스코와 접합점을 만들어낸다. ‘Fingertip’이 펑키하고 화려한 디스코에 로킹한 사운드를 얹어 맹렬한 기세를 다졌다면, ‘MAGO’는 당당하고 흥겨운 태도를 견지하되 박자감을 한층 단순하게, 현악을 한층 가볍게 늘어뜨리며 기합이 걷어진 자리를 여유로 가득 채운다. ‘Fingertip’과 ‘MAGO’를 나란히 이어듣는다면 기대 이상으로 매끄러운 흐름에 놀라게 될 것이다.
한편 이어지는 수록곡은 역대 여자친구의 모든 미덕을 고급스러운 만찬처럼 펼쳐놓는다. 러프한 기타 반주 위에서 “파워 시크”함을 과시하는 ‘Love Spell’을 지나면, ‘Three Of Cups’, ‘GRWM’, ‘Secret Diary’에서 작년 “Fever Season”으로 업그레이드된 여자친구만의 청량함과 사근사근함, “파워 청순”을 마주치고, ‘Better Me’, ‘Night Drive’에서 “격정 아련” 시기의 성숙한 사색을 감지하게 된다. “回” 시리즈의 주요곡들을 돌이키고 당도하는 ‘앞면의 뒷면의 뒷면’은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소회를 풀어헤치며 기나긴 여정을 마무리한다. “지금 이 길이 맞는지 / 수없이 되묻고 또 의심한 날들 / 끝이 어딜지 몰라도 / 난 가볼게 계속”, “이젠 멈춰 서지 말자 / 마음의 나침반을 믿기로 해 / 끝은 정해진 게 아냐 / 더 가보자 계속”이라는 되뇌임을 듣고 있자면, 이제까지의 모든 행보를 긍정하면서도 새로운 내일을 향한 정진을 멈추지 않겠다는 심지가 느껴진다. 이전의 앨범들과 비교했을 때 유달리 ‘나’에게 초점이 맞춰져있는 가사 역시 그 방증이리라. 이제와 돌이켜보면 ‘Apple’의 과감한 변화는 ‘Fingertip’ 이후 ‘귀를 기울이면’을 내놓았을 때와 같은 번복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의의 표명이 아니었을까.
“回:Walpurgis Night”은 ‘Fingertip’ 이후 멀리 돌아온 여자친구의 “제 2막”이다. 빅히트의 집도 하에 다소 급작스러워보이는 전이를 단행하는 가운데 이질감이 없었다면 물론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 이질감을 곧바로 위화감으로 단정짓기는 곤란하다. “날 위해서라면 저 끝까지 갈” 것이라는 (‘Labyrinth’ 中) 결단이 뿜어내는 생명력 때문이다. 여자친구는 직선적으로 전진하는 “파워 청순”의 1차원, 닫힌 도형과도 같은 세계 속 방황을 담은 “격정 아련”의 2차원을 지나, “그저 원하면 원하는 대로 기쁨과 슬픔 그대로 다 내가 될 거”라 외치는 (‘MAGO’ 中) “청량 마녀”의 3차원을 구축한다. 입체적으로 변모한 세계관 위에서 이들이 또 어떤 교차로를 마주하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이들의 달음박질이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만큼은 분명해보인다. ‘발푸르기스의 밤’을 기꺼이 즐길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스큅: 2020년 SMP가 다다른 지경, 혹은 경지를 논하기 위해서는 이 앨범을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타이틀곡 ‘영웅’에 쏟아진 “마라흑당치즈불닭”이라는 감상은 앨범의 무지막지한 스펙트럼을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NCT #127 – Neo Zone”은 햇살 가득한 오후의 정광 ‘낮잠’, 비오는 날의 로맨스 ‘우산’, 콘서트 앵콜 무대를 보는 듯한 ‘Not Alone’ 등 심상적으로 다양한 배경을 연출하는 것을 넘어, 음악적으로 다양한 시공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SMP의 정수 ‘영웅’부터, NCT가 주장해온 ‘네오’함을 과시하는 ‘뿔’, 예스러운 감각을 예리하게 벼른 ‘Sit Down!’, 하비 메이슨 주니어가 ⟨드림걸스⟩ OST를 케이팝에서 재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드는 우직한 R&B ‘백야’, 90년대 S.E.S.를 오마주한 듯한 ‘Dreams Come True’까지. 멜론 차트에서도 사랑받을 법한 기분 좋은 팝 ‘Elevator’와 ‘꿈’부터, 사운드클라우드 트렌딩 플레이리스트에서 건져올린 듯한 ‘백일몽’, 스포티파이 힛츠 틈새에 위화감 없이 섞여들어갈 ‘메아리’까지. ‘Interlude: Neo Zone’를 중심으로 단단히 봉합된 12곡은 ‘채널 NCT’라는 콘셉트에 맞춰 천연덕스럽게 각기 다른 ‘Zone’들을 HQ로 송출하며, NCT를 통해 확장증보된 SMP의 새로운 지대 “Neo Zone”을 선보인다. SM의 ‘신문화기술’은 NCT의 시스템이 아닌 그들의 음악을 통해 축조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은재: “EQUAL”은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재능으로 가득 찬 앨범으로, 감상하고 나면 어떤 히트작 프로듀서의 포트폴리오를 들여다본 기분마저 든다. WOODZ가 가진 재능이란 곡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소화하고 부르는 능력, 영상으로 번역하거나 퍼포먼스로 연출하는 능력까지를 포괄하는데, 심지어 콘셉트나 무드에도 구애되지 않는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장르적으로도 R&B부터 펑크까지 다양할 뿐만 아니라 가사 또한 곡마다 저마다의 확고한 콘셉트를 가지고 있어 모든 트랙이 개별 싱글로서도 수작이다. 제각각일 것 같은 싱글이 일정한 톤으로 잘 ‘equalize’ 된 앨범이지만, 이게 WOODZ가 할 수 있는 전부는 분명 아닐 것이라는 확신 또한 든다. 뒤늦게 알려졌다는 사실이 의아할 정도로 한눈에 띄는 쇼맨십 또한 앨범 전반에서 강렬하게 느껴지는데, 금속성의 음색은 금관악기처럼 비트 위를 때릴 때도 있고, 현악기처럼 우울하게 울릴 때도 있어 그가 일정한 포맷의 기획물에 갇히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훌륭한 보컬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한다.
마노: “새까만 악몽의 세계”를 스스로 빠져나온 드림캐쳐가 향한 곳은 황량한 ‘디스토피아’였다. 악몽 속을 헤매던 “어둑한 소녀”들은 ‘마녀’들이 되고, 온몸이 불타는 고통 속에서 ‘반(反) 이상향’을 향한 절망과 원망을 담아 비명을 지른다.
“Dystopia: The Tree of Language”는 (디지털 싱글을 제외하면) 그룹의 통산 8번째 발매작인 동시에 기념비적인 첫 정규 앨범이기도 하다. 길고 길었던 ‘악몽 시리즈’에 드디어(!) 종지부를 찍고서 선보이는 새로운 시리즈의 시작이자 첫 정규 발매작이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그룹의 터닝 포인트라 할 만한데, 만듦새 역시 탄탄해서 지금까지 쌓아온 디스코그래피에 있어 어떤 정점을 찍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앨범 제목처럼 ‘악몽’이라는 연작을 통해 뚝심있게 구축해온 음악적 토양을 단단한 대지 삼아 자라난 아름드리 나무를 보는 것 같다고 할까. 팀이 그간 추구해온 기존의 음악적 세계관을 계승하는 트랙들(‘Scream’, ‘Tension’, ‘SAHARA’)이 땅속 깊이 내린 뿌리라면, 다양한 장르로 변주를 더한 곡들(‘Black or White’, ‘Jazz Bar’, ‘In The Frozen’)은 저마다의 모양새로 뻗어나간 가지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트랙 간의 유기성이 탁월함은 물론 앨범 전체가 구조적으로 잘 짜여있어 볼륨이 상당히 방대함에도 지루하거나 부담스럽지 않다. 지금까지 견고하게 쌓아올린 음악적 세계관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나름의 새로운 시도를 성공적으로 이뤄내며, 그룹이 가장 잘하는 것과 지금껏 잘해온 것을 유지하면서도 식상해지지 않도록 완급을 잘 조절했다. 무엇보다 그 바탕에 그간 팀과 꾸준히 작업해온 LEEZ와 Ollounder의 프로듀싱, 그리고 쉽지 않은 장르를 수월하게 소화해내는 멤버들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거기에 보너스 트랙 격으로 수록된 멤버 시연의 자작곡 ‘Paradise’가 그룹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엿보게 하며 앞으로를 더욱 기대하게 한다. 마치 크레딧(‘Outro’)이 다 올라간 영화의 예기치 못한 쿠키 영상을 발견한 것만 같은 반가움이랄까. 잠시 팀을 떠나있었던 한동이 다시 합류했다는 기쁜 소식에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하며, 드림캐쳐와 프로듀싱팀이 정성들여 가꿔나가는 이 나무가 앞으로도 단단하게 자라나기를 바란다. “어둑했던 소녀 시절”을 잊지 않아주어서 정말로 고맙다는 말과 함께.
랜디: 데뷔 이래 방탄소년단이 쌓아온 창작 및 퍼포먼스 역량과, 자연인으로서 성장한 이들의 사고관까지, 7년의 여정을 집대성해 스무 트랙에 차고 넘치게 담았다. 워낙에 길고 각 곡의 무게도 만만치 않지만, 이 앨범이 표제처럼 “영혼의 지도”를 상정했고 ’Intro: Persona’와 ‘Interlude: Shadow’, 그리고 ‘Outro: Ego’가 각각 지도의 마일스톤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이해하면 길을 따라 걷기가 어렵지 않다. 사운드는 빌보드 톱 차트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데 비해 메시지는 불특정의 대중보다는 방탄소년단의 7년을 함께 한 사람, 혹은 역주행으로 그 7년을 한번은 톺아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커리어가 길어질수록 셀프-레퍼런스 리스트도 길어지는 바, 어쩌면 방탄소년단의 마지막 앨범이 될 수도 있었던 이 대작은 폐쇄적이라는 평가 이전에 오히려 이만큼의 내밀한 스토리에 이렇게 많은-전세계에 걸친-사람들이 반응했다는 케이팝 사상 유래없는 기록으로 기억될 것이다. “모두 비웃던 한땐 부끄럽던 이름”이 “이건 쇠로 된 증명 bullet-proof”가 되기까지. 좋은 7년이었다 뿌듯해할 만 하다.
심댱: 백현이 관찰한 사랑의 얼굴은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럼을 넣은 초콜릿처럼 씁쓸한 뒷맛을 남길 때도 있다. “Delight”는 자기주장이 강한 트랙들로 구성된 전작보다 정서의 흐름을 고르게 전달하면서도 솔로 아티스트로서 구현하고자 하는 컬러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Candy’는 눈을 홀리게 하는 사탕 바구니의 모습으로 앨범의 큰 틀을 제시하며 ‘다양한 맛의 사탕을 준비했으니 마음 가는 대로 챙겨 들어도 좋다’는 긍정의 사인을 보낸다. 포장을 한 꺼풀 걷어내면 이 솔로 아티스트는 사랑 앞에 자신만만한 태도와 멜랑콜리를 교차하며 비터스위트와 같은 조화를 선물한다. ‘R U Ridn’?’은 ‘내 노래를 넣어 너의 Playlist’라는 가사에 걸맞게 타이틀곡의 자신감을 이어받고, ‘Poppin”이 전하는 고백은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파핑 캔디처럼 화사하다. Sweet 사이사이에 배치된 Bitter 트랙은 미량의 소금처럼 사랑의 단맛을 감칠맛 나게 표현하는 한편 정서의 깊이를 심화한다. 피아노의 보랏빛 파도를 타고 상대에게 뛰어드는 절박함(‘Bungee’), ‘최소한의 숨’만 쉬어 가며 그에게 깊이 잠겨가는 마음의 점성(‘Underwater’), 섬찟할 만큼 화한 속도감과 대비되는, 상대를 무기력하게 받아들일 때의 탄식(‘Ghost’) 등으로 사랑하는 자의 복잡한 내면을 조명한다. 이 비터스위트의 조화가 가장 강렬하게 빛나는 트랙은 ‘Love Again’이다. 저음에서부터 가성까지 보컬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달콤한 멜로디는 사랑을 갈구하는 씁쓸한 설정을 관통하며 “Delight”의 정점을 찍는다.
사랑의 명과 암을 담은 모음은 다양한 감정을 스스럼없이 전달하는 백현의 얼굴로 변모한다. 입안에 굴릴 때마다 다른 맛이 혀에 배이게끔 세심하게 함유량이 조절된 사탕처럼, “Delight”는 당신의 까다로운 취향을 위해 준비된 2020년의 수작이라 할 수 있다.
조은재: 활동 기간이 긴 모든 아티스트가 그렇지만, 특히 20년이라는 긴 시간을 쉬지 않고 활동한 가수에 대해서는 시대와 세대별로 그를 인식하는 이미지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앨범은 보아를 ‘ID: Peace B’로 기억하는 사람과 ‘No.1’으로, ‘Only One’으로, 혹은 ‘LISTEN TO MY HEART’나 ‘抱きしめる’로 기억하는 사람에게까지도 익숙한 보아를 들려준다. 타이틀곡 ‘BETTER’는 2000년대 유행하던 R&B에 박력있는 베이스 사운드와 고난도의 퍼포먼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시대를 불문하고 보아만의 시그니처로 각인된 요소이며, 앨범의 모든 트랙이 보아의 이전 커리어에서 레퍼런스를 찾을 수 있게 디자인되어 있다. 그러니까 당신이 어떤 보아를 사랑했든, 지금의 보아 또한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이 앨범은 역설하고 있는 셈이다. 단 한 순간이라도 보아를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반드시 일청해볼 것을 권한다.
랜디: 올해의 앨범 20선에는 “; [Semicolon]”을 꼽았지만, 이 음반은 사실상 2020년 상반기에 발매된 “헹가래”와 함께 들어야 한다. 지난 12월 공개된 ‘Left & Right’와 ‘HOME;RUN’의 MAMA 무대 연출은 연이어 들었을 때에 하루의 낮과 밤처럼 완결적 의미를 갖는 이 두 EP의 성격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2017년 데뷔 초의 일명 ‘청량’ 노선에서 조금 더 이모셔널한 EDM으로 노선을 틀었다고 생각했는데, 모두가 예외를 겪은 2020년 과감하게 업비트로 또 한 번의 노선 변화를 꾀한 점이 흥미롭다. 누군가는 데뷔 초로 돌아간 것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음악의 전체적인 톤은 조도를 조금 낮춰서 그 때보다 성숙한 느낌이다. 사용한 음계들이 마냥 해맑기보다는 조금 블루한 인상을 주고, 재즈적 요소를 표방하는 악기 선택도 이런 느낌에 한몫을 한다. 전에도 연극적인 성격이 강했던 세븐틴표 퍼포먼스는 스윙재즈 요소를 뿌린 타이틀곡에 힘입어 더욱 브로드웨이 앙상블 같아졌다. 세븐틴이 전하는 청춘찬가는 업비트일 때, 또 멤버 간의 손발이 척척 맞을 때 가장 파괴적이다. 올해 최고의 웹 예능은 ⟨고잉 세븐틴⟩이라는 사견도 덧붙인다.
심댱: “노래를 듣고 힐링하셨으면 좋겠다”라는 가수의 소망을 들을 때마다 피어오르는 의구심 같은 게 있다. ‘그들이 주고 싶어 하는 힐링의 대상은 구체적일까?’ (물론 높은 확률로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만) 그 과정이 막연하다면, ‘힐링’의 무게감은 얄팍하게 느껴지기에 십상인지라 삐뚠 마음으로 던진 질문이기는 하다.
‘꽃길’과 ‘터널’ 등 특유의 포근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네 오던 보컬리스트, 세정은 그룹 활동 전후로 조금씩 내보였던 위로를 첫 미니앨범 “화분”으로 모아 전달했다. 그는 위로의 대상을 안전하면서도 까다로운 대상, 자기 자신으로 두며 메시지를 조심스럽게 전개한다. 각 트랙은 자신의 오후부터 그다음 날 저녁까지 시점을 옮겨가며 따뜻한 시선으로 응원을 보낸다. ‘그늘진 마음’에 귀를 기울이게 할, 내면의 목소리를 ‘초록’에 비유한 ‘화분’은 마음이 잔잔해질 오후의 시간으로 시작하고 ‘오늘은 괜찮아’는 걱정으로 지새운 어느 날 밤을 차분히 잠재우며 아침으로 이끌어간다. 비행운처럼 멀리 뻗어 나가는 하이노트와 웅장한 코러스로 마무리되는 ‘SKYLINE’과 물빛 어린 멜로디에 가벼운 호흡을 담은 ‘오리발’은 분주한 아침 출근길을 떠오르게 한다. 형체가 뚜렷하지 않은 그리움을 소재로 한 ‘꿈속에서 널’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단출한 구성은 고단했던 하루를 눈꺼풀에 밀어 넣는 늦은 저녁을 연상시킨다.
세정은 타이틀곡을 제외한 모든 트랙의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며 앞서 제시한 의심 어린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낸다. 앨범 소개 글에서 기술한 것처럼 “내가 나를 위해 듣게 되는 위로”를 똑바로 겨냥하는 이 EP는 세정을 ‘힐링을 오롯이 전할 수 있는 영리한 아티스트’로 소개한다. 대중에게 자신의 가능성을 효과적으로 제시한 앨범, “화분”을 넘어 그가 앞으로 전할 또 다른 정서의 스케치가 기대된다.
시그니처 “Listen and Speak”
랜디: 알록달록한 색채감을 무기 삼는 신인 걸그룹은 많지만, 이 앨범은 알록달록 하다 못해 고의적으로 주의를 분산시키는 산란함으로 가득하다. “오버블로운 베이스와 게임 같은 신스, 높은 피치의 깜찍한 보컬, 팝적인 탑라인”(동일 가수 신인평에서 발췌) 등의 조합은 찰리 XCX 같은 젊은 인터넷발 음악, 좀 더 좁히면 “하이퍼팝”이라 묶이는 그즈음 같다. (‘눈누난나’ 가사에서 내비치는 ‘Vroom’이나 ‘Pow-p-p-pow’ 같은 의성어는 힌트가 아닐까.) 이런 조합은 2000년대 일본 전자음악 씬에서 발생해 캬리 파뮤파뮤 등의 성공으로 메인스트림으로 뻗어나갔고, 지난 10여 년 간 서구 인터넷의 서브컬쳐 향유자들 사이에서 사회의 변두리적 요소들과 뒤섞이며 지금의 형태에까지 왔다. 그 시간 동안 소녀시대 같은 케이팝 역시 그 서브컬쳐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다. 20년 동안 지구 한 바퀴를 돌아온 이 콘셉트는 그래서 어쩌면 전세계에서 케이팝 아이돌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종류의 음악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앨범 전반부의 ‘타격감’은 이들을 2020년 가장 인상적인 신인 중 한 팀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서드: 저마다의 음색과 스타일을 지닌 멤버 구성 만큼이나 각기 다른 느낌의 열두 트랙으로 채워진 팀의 첫 정규앨범. 자작곡과 유닛곡을 비롯해 팬송 격의 발라드 트랙까지, 팀이 지닌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선보이기 위해 애쓴 흔적이 뚜렷하다.
댄스 팝과 발라드가 들쑥날쑥 뒤섞인 사이사이 유닛곡들마저 배치된 트랙 리스트는 앨범보다는 차라리 콘서트의 세트리스트에 더 가까워 보이지만, 기존 발표곡과 사뭇 다른 매력을 지닌 ‘EYES’와 ‘DREAMLIKE’가 신선함으로 초반부에 귀를 집중시키고, 한 편으론 ‘AYAYAYA’나 ‘SPACESHIP’처럼 익숙한 곡들이 안정감을 주면서 균형을 잡는다. 귀여운 콘셉트가 어울리는 멤버들의 장점을 끌어올린 ‘SO CURIOUS’나 ‘PINK BLUSHER’ 같은 곡과 보컬 멤버들의 매력이 강조된 ‘언젠가 우리의 밤도 지나가겠죠’ 등, 유닛곡을 통해 다인원 그룹이 지닌 장점을 백분활용한다.
타이틀곡 ‘FIESTA’는 ‘라비앙로즈’와 ‘비올레타’의 기시감을 더 빠른 템포와 풍성한 사운드로 변주하면서 자기복제가 아닌 아이즈원만의 시그니처 스타일을 완성시키는 화룡점정 같은 곡이다. 팀의 색깔을 확고히 다지기 위한 세밀한 기획과 곡 선정, 그에 걸맞게 정교하게 짜여진 안무와 그걸 수행해내는 퍼포먼스까지 합쳐져 Flower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12인의 재능과 매력이 만개하는 앨범.
스큅: 타이틀곡 ‘MAGO’의 디스코는 (…) ‘Fingertip’의 디스코와 접합점을 만들어낸다. ‘Fingertip’이 펑키하고 화려한 디스코에 로킹한 사운드를 얹어 맹렬한 기세를 다졌다면, ‘MAGO’는 당당하고 흥겨운 태도를 견지하되 박자감을 한층 단순하게, 현악을 한층 가볍게 늘어뜨리며 기합이 걷어진 자리를 여유로 가득 채운다. ‘Fingertip’과 ‘MAGO’를 나란히 이어듣는다면 기대 이상으로 매끄러운 흐름에 놀라게 될 것이다. (…)
“回:Walpurgis Night”은 ‘Fingertip’ 이후 멀리 돌아온 여자친구의 “제 2막”이다. 빅히트의 집도 하에 다소 급작스러워보이는 전이를 단행하는 가운데 이질감이 없었다면 물론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 이질감을 곧바로 위화감으로 단정짓기는 곤란하다. “날 위해서라면 저 끝까지 갈” 것이라는 (‘Labyrinth’ 中) 결단이 뿜어내는 생명력 때문이다. 여자친구는 직선적으로 전진하는 “파워 청순”의 1차원, 닫힌 도형과도 같은 세계 속 방황을 담은 “격정 아련”의 2차원을 지나, “그저 원하면 원하는 대로 기쁨과 슬픔 그대로 다 내가 될 거”라 외치는 (‘MAGO’ 中) “청량 마녀”의 3차원을 구축한다. 입체적으로 변모한 세계관 위에서 이들이 또 어떤 교차로를 마주하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이들의 달음박질이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만큼은 분명해보인다. ‘발푸르기스의 밤’을 기꺼이 즐길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여자친구 “回: Walpurgis Night” (2020) 리뷰 中 일부 발췌)
서드: 미니앨범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팀이 지닌 다양한 장점과 매력을 곡마다 한껏 꾹꾹 눌러 담은 동시에 변화와 유지의 균형을 잡는 데 성공했다. 타이틀곡 ‘살짝 설렜어’와 올여름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은 노래 중 하나인 ‘Dolphin’으로 이어지는 두 곡의 흐름만으로 이미 만족스러울 만큼 오마이걸다운 에너지가 흘러넘친다. 쉼표를 찍듯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꽃차’로 보컬을 만끽하고 나면, 거리에 밝힌 네온사인을 사랑하는 이에게 밝혀둔 마음의 신호로 은유한 가사가 돋보이는 ‘NE♡N’이 흘러나온다. 오마이걸하면 함께 떠오르는 서지음 작사가와의 시너지가 특히 빛을 발하는 곡. 이어지는 ‘Krystal’은 ‘CLOSER’나 ‘비밀정원’처럼 오마이걸의 고유한 색깔 또한 여전히 남아있다고 암시하듯, 몽환적 사운드와 애절한 멜로디로 앨범의 문을 닫는다.
부쩍 늘어난 관심과 인기에 부담이 컸을 법도 한데, 전작에 비해 오히려 힘을 뺀 것처럼 담백하고 여유로운 모습에서 이들이 여태까지 롱런해올 수 있었던 비결을 엿본 듯하다. 따스하지만은 않았던 ‘다섯 번째 계절’을 지나 ⟨퀸덤⟩이란 바람을 뚫고 걸어온 오마이걸. 올 한 해 다양한 예능과 무대에서 주목 받으며 더할 나위 없이 활발한 활동을 보였음에도 아직 이들에게 ‘최고의 해’는 오지 않았다고 믿는다. 늘 마음 한구석에 왠지 모르게 품고 있던 오마이걸에 대한 주제넘은 걱정과 조바심을 이제는 놓아도 될 것 같다.
마노: 누가 뭐래도 온앤오프의 음악적 세계관의 구심점은 황현으로 대표되는 모노트리 사단이라는 것에 이견을 가질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모노트리는 온앤오프의 데뷔작 “ON/OFF”부터 그룹의 통산 네 번째 발매작 “SPIN OFF”까지 일관적으로 프로듀싱해왔다. 어느 특정 프로듀서나 팀이 한 그룹의 디스코그래피에 꾸준히 관여해온 케이스가 특히 작금의 케이팝씬에서는 드물기에 유독 돋보이기도 하거니와, 어느덧 3년차에 접어든 그룹의 음악적 이모저모를 가장 적확히 이해하면서 그에 맞는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는 이정표와도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은 다른 그룹에는 없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최대의 변별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간 쌓아온 디스코그래피가 단단하고 날카롭게 벼리고 벼린 무기라고 한다면, 한껏 물오른 그룹의 에너지와 수행력은 그 무기를 보다 효율적으로 휘두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무공에 해당하지 않을까. 이전에 없던 새로운 음악적 스펙트럼(특히 ‘오늘 뭐 할래’는 그룹이 최초로 시도하는 래칫 트랙이다)을 선보이면서도 그것이 전혀 어색하거나 생뚱맞아 보이지 않는 것은, 단언컨대 음악을 만드는 이와 그것을 수행하는 이 각각의 능력치는 물론 그 둘의 탄탄한 합 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 앨범은 아티스트와 프로듀서(혹은 프로듀싱 팀) 간의 끈끈한 음악적 신뢰도와 각각의 역량이 어떠한 경지에 올랐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후덥지근하고도 시원한 이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스쿰빗스위밍’으로 문을 힘차게 열고 나면, 간질간질한 설렘이 가득한 ‘첫 키스의 법칙’이 기대감을 부풀게 한다. 이어서 서슬 퍼런 ‘제페토’와 젊음의 에너지로 한껏 흥청거리는 ‘오늘 뭐 할래’로 텐션을 끌어올린 뒤, ‘선인장’과 ‘Message’로 차분히 가라앉히고 나서 비장하게 내달리는 ‘신세계 (SPIN OFF Ver.)’(기발매 버전 인트로의 오케스트레이션을 신스 사운드로 대체하여 새로움을 더했다)로 진한 여운을 남기며 앨범은 끝을 맺는다. 각각의 트랙이 무척이나 빼어난 완성도를 자랑함은 물론, 개성 강한 트랙들을 하나로 봉합하는 유기성도 출중하여 ‘앨범’ 단위의 듣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최대의 미덕. 한 계단 한 계단 꾸준히 성장하며 확장세를 더해가는 ‘온앤오프 월드’의 다음이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조은재: 개인적으로 감상을 위해 들인 시간 등의 자원에 비해 더 많은 가치를 얻게 해준 노래에 부채감을 느끼곤 하는데, 올해 가장 많은 빚을 진 앨범으로 이 앨범을 꼽는다. ‘부탁해’나 ‘이루리’에서 보여준 파괴력을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BUTTERFLY’보다 ‘HOLA’나 ‘바램’이 타이틀곡감으로 꼽히기도 했지만, 우주소녀 고유의 캐릭터를 잃지 않으면서도 적시에 포즈를 걸어준 앨범이라는 측면에서는 높이 평가될만하다. 과격할 정도로 무거운 비트와 뱅어로 무장한 K-pop 트렌드 속에서, 예민함과 섬세함을 유지하면서도 우주소녀답게 밝고 힘찬 에너지를 내뿜는 ‘BUTTERFLY’를 위시해 ‘Pantomime’, ‘불꽃놀이’와 같은 트랙을 담은 이번 앨범이야말로 우주소녀의 전체 디스코그래피 중에서도 특별히 주목할만한 앨범이다. 우주소녀는 워커를 신든 하이힐을 신든 힘차게 걷는다는 것을 보여준 앨범.
하루살이: 1년여에 걸친 데뷔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정규 앨범이다. 세 개의 싱글과 신곡이 골고루 섞여 “ONE”을 구성한다. 트랙을 발매 순서와 다르게 재배치해 원위의 음악 스펙트럼을 다시 정리했다. (…)
연주력이 충분히 뒷받침해주니 그 어떤 장르를 선보여도 어색하지 않다. 특히 메인 기타가 매끈한 톤을 유지하며 모든 곡을 능청스럽게 넘어 다닌다. 덕분에 원위가 앞으로 어떤 음악을 할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무엇을 해도 좋겠다는 예감이 든다. 다만 각각 성향 다른 목소리들이 솔직함을 유지하면서 지금보다 조화를 이룬다면 그때는 예감이 아니라 확신이 들지 않을까. 분명 아쉬움이 남지만, 한계점이라기보단 성장의 여지로 보인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다음이 더 기대된다. (원위 “ONE” (2020) 리뷰 中 일부 발췌)
마노: 솔로 데뷔에 있어서 최대 딜레마는, 기존 그룹의 색깔와 솔로로서의 역량 사이의 교집합을 그려내면서 그 안에서 여타 솔로 아티스트와의 변별점을 찾아내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해 모그룹이 가진 매력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해당 멤버가 가진 역량을 충분히 살려내는 동시에 어디서도 보지 못한 새로운 ‘한 끗’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뜻인데, 이미 과포화 상태에 이른 케이팝 씬에서 말처럼 쉬운 일일 리가 없는 그것을 유아는 끝내 해낸다. 오마이걸이 꾸준히 그려온, ‘몽환’으로 표현되곤 하는 소녀의 이미지를 계승하면서도 유아가 가진 보컬과 퍼포먼스에 있어서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있음은 물론, 지금까지 어떤 솔로 아티스트도 시도해본 적 없는 절묘한 틈새를 파고든다는 점에서 프로덕션의 치밀한 기획력이 엿보인다. 타이틀곡 ‘숲의 아이’에서는 대중이 익히 보아온 ‘오마이걸의 유아’와 ‘솔로 유아’의 교집합을 성공적으로 그려내고, 여러 장르가 포진된 수록곡을 통해서는 상대적으로 지금까지 내보일 기회가 적었던 다채로운 캐릭터와 음악적 스펙트럼을 펼쳐보인다. 드라마틱한 ‘숲의 아이’로 고조되었다가 ‘날 찾아서’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Diver’에서 다시금 텐션을 끌어올린 뒤 ‘자각몽’에서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End of Story’로 산뜻하고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앨범 전체의 흐름과 밸런스도 출중하다. 무엇보다 다채로운 캐릭터와 음악적 스펙트럼을 자유로이 오가는 유아의 존재감과 수행력이 뒷받침되었기에 솔로 데뷔에 있어서 당위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토록 세심한 프로덕션이 타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에 있어서는 미숙했다는 점은 못내 아쉬워지는 포인트. 그럼에도 본작은 아이돌 솔로 데뷔에 있어서 하나의 모범 사례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랜디: 흔히 이제 대중음악에서 “멜로디는 죽었다”고들 한다. 힙합과 EDM이 지금의 팝(그리고 케이팝)을 점령하며 선율보다는 톤이나 리듬에 중점을 두는 음악이 확실히 많아지기는 했다. 그래서 요즘은 아름다운 멜로디가 오히려 ‘레트로’의 상징이다. 노스탤지어를 겨냥한 유키카의 첫 정규 앨범 “서울여자”는, 멜로디가 귀한 대접을 받던 20세기 음악을 성공적으로 재현한다. 특히 당대 국내 웰메이드 가요들이 레퍼런스 삼았던 제이팝의 구석구석을 일본인 케이팝 가수가 한국어로 들려준다는 아이러니가 재미있다. 산들거리는 미디움 댄스 알앤비 ’Yesterday’에서는 S.E.S 등에 영향을 주었을 우타다 히카루가, 요즘 케이팝처럼 시작해 클래지콰이 초기 음악처럼 전개 되는 ’안아줘’에서는 피치카토 파이브가, 그리고 Ddim – G7(ii° – V) 단 두 코드만으로도 윤상 음악의 쓸쓸함이 연상되는 ‘그늘’에서는 마이너 시티팝의 장인 키스기 타카오(来生 たかお)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한 가지 아쉬움은 ‘서울여자’의 메시지가 ‘한국 문화에 서툰 외국인 여자’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는 것. 도쿄에서 서울로 이주한 ‘도시인’ 유키카의 ‘시티-팝’도 좋았을 텐데.
스큅: “다시는 춤추지 않겠다”는 도발적인 제목을 단 태민의 정규 3집은 “모든 것을 불태우고 다시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는 그의 열망(⟨더블유 코리아⟩ 2020년 9월호 인터뷰 中)이 고스란히 담긴 앨범으로, 그 중 제1막은 “모든 것을 불태우”는 자학과 회한의 챕터다. 그가 그리는 파국이 치명적이지만 결코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그것이 성장통 격의 시련도, 모종의 사명에 따른 희생이나 강박도, 서사적 비극에 대한 집착이나 도취도 아닌, 순수한 탐미에 기인하기 때문일 것이다. 의(義)가 곧 미(美)인 태민의 세계관에서 더 정결한 자신, ‘이데아’를 향한 구도의 과정은 위험천만할지언정 위태롭지 않으며, 지난하더라도 버거운 중압으로 흐르는 법이 없다. 어두운 색채로 칠해진 앨범이 가뿐하고 산뜻하게까지 느껴지는 이유다.
타이틀곡이자 1번 트랙인 ‘Criminal’은 (‘Press Your Number’ 때와 마찬가지로) “날 망치는 Criminal”을 자기 자신으로 재귀시키며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는 위험한 소재를 고혹적인 신화로 비틀고, 이어지는 수록곡의 모노드라마를 위한 포석을 놓는다. “내 안에 숨어있던 너”를 마주하며 폭발하는 ‘Black Rose’, 무대에서의 미혹과 갈등을 비추는 ‘Famous’ 등 자가 연소적인 쾌락으로 번뜩이는 전반부부터 ‘Clockwork’, ‘Nemo’ 등 옛 연인(혹은 ‘Criminal’의 재귀 용법을 적용시킨다면 자기 자신)을 그리는 서정적인 트랙들로 채워진 회한의 후반부까지. “Never Gonna Dance Again : Act 1″은 “아프면서 황홀”한 수행기를 담아내며, 이는 “Act 2″에서 ‘이데아’를 쏘아올리고 새로운 ‘Identity’를 노래하는 소생의 서사로 이어진다. 이러니 태민의 무대를 ‘미디어 성경’으로 일컫는 농반진반 격의 찬사를 마냥 호들갑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태민의 미(美)를 향한 구도자적 행보의 결실과도 같은 앨범.
서드: “My Little Society”는 아홉명의 멤버 각자의 취향과 매력을 보여주겠다는 테마로 잡은 세 번째 미니 앨범으로, 실제로 발매 시기에 맞춰 멤버 9인의 개인 SNS 계정을 동시에 개설하면서 팬서비스 효과까지 거두는, 콘셉트에 충실한 프로모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Feel Good’은 ‘LOVE BOMB’과 ‘FUN!’보다는 조금 차분해진 분위기와 이전보다 좀 더 팝에 가까운 스타일을 지향한 듯 레트로한 사운드가 두드러지는, 아마도 여태까지 타이틀곡 중 가장 대중 지향적인 스타일의 곡이다. 포지션에 구애 받지 않은 고른 파트 분배는 멤버마다 각자의 음색이 잘 어울리는 파트를 받은 듯한 섬세한 디렉팅이며, 팀의 보컬 층이 생각보다 두터워진 것을 느낄 수 있는 결과물이다.
숨은 수록곡 명가로 알려진 만큼 이번에도 멤버 이서연의 자작곡 ‘별의 밤’을 비롯해 다양한 수록곡들이 눈에 띄는데, 특히 스페셜 뮤직비디오도 제작해 공식 유튜브 계정에서 감상할 수 있는 ‘Weather’와 ‘물고기’ 두 곡은 올해의 수록곡으로 꼽아도 부족함 없을 매력적인 트랙이니 감상을 추천한다. 1년 3개월이라는 긴 공백의 아쉬움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만족스러운 앨범.
심댱: 축축한 마음 한구석에 도착했을 때, 화사는 마리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경험을 선사한다.
트렌디와 소울풀을 넘나드는 화사의 보컬은 ‘Kidding’에서처럼 이성이 끊어지는 듯 쪼개지는 하이햇 사이에서 무신경하게 읊어지기도 하고, 타이틀곡 ‘마리아 (Maria)’에서는 이유 없는 미움을 향한 환멸과 위로라는 이질적인 요소와 팽팽한 겨루기를 하기도 한다. 셀럽 화사와 자연인 안혜진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는 사랑이라는 암막으로 가려둔다 해도 뚜렷하게 느껴진다. 헤이터에게 다친 마음을 사랑의 상처로 치환하며 다 망했다는 식으로 내팽개치다가도, “꽃길만 길인가” 하고 다시 자세를 고치며 다이아몬드처럼 흠집나지 않는 단단함을 노래한다. 대중의 시선과 내면의 갈등에 아파하지마는 ‘넌 이미 아름다운데’라는 말로 다독일 수 있는 그는, 어쩌면 지치고 힘들 언젠가의 자신을 다시금 일으켜 세우개 할 이정표를 앨범으로 온전히 구현해내려 한 게 아닐까 싶다. (보너스 형식의 배치인 솔로 데뷔곡 ‘멍청이’를 제외하고) ‘Intro : Nobody else’부터 ‘LMM’까지, 시끄러움을 몰고 다니는 셀러브리티보다도 안혜진의 속마음을 드러내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그 노력의 어려움마저 여실히 담은 앨범.
2020년은 팬데믹의 여파로 케이팝 시장이 유례 없이 움츠려들었던 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팀들이 좋은 음반과 노래를 발표했다. 케이팝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뮤직비디오 역시 다양한 재미와 매력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아이돌로지는 2020년 주목할 만한 뮤직비디오를 각 작품의 개성과 색깔에 따라 부문을 나누어 필진들의 추천작 플레이리스트를 구축해보았다. 비경쟁부문인 만큼, 또 유난히 특수한 해였던 만큼, 여러분이 자칫 놓칠 뻔한 뮤직비디오를 한 편이라도 많이 보여드리고 싶기에 예년과 달리 부문 별로 작품을 선정해 나누어 소개한다. 부문별 플레이리스트는 본문에 첨부한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21년에는 하루라도 빨리 사태가 정상화되어 케이팝 씬도 다시 활발해질 수 있기를 소망하며, 응원의 마음으로 선정한 작품들을 그저 즐겁게 감상하고 발견해주시기를 바란다.
2020’s SMB(SUGAR MARA BUBBLE)
가끔은 보고 있으면서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싶은 뮤직비디오가 많다.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저 느끼는 순간에야 비로소 참 매력을 알게 되는 케이팝의 비주얼 세계. 폭우처럼 쏟아지는 사운드와 그에 걸맞는 현란한 영상으로 우리의 눈과 귀를 현혹시키는 케이팝 뮤직비디오의 맵고, 짜고, 달고… 하여간에 당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모든 맛이 뒤섞인 ‘흑당마라버블티’가 여기에 있다.
NCT 127 ‘영웅’
몬스타엑스 ‘Love Killa’
스트레이키즈 – ‘神메뉴’
에버글로우 ‘LA DI DA’
에이티즈 ‘THANXX’
이달의 소녀 ‘So What’
2020’s Luxury
케이팝 뮤직비디오의 가장 큰 특징이자 묘미는 역시 자본과 기술이 집약되어 만들어낸 화려한 영상미 아닐까. 현란한 축제 또는 화려한 파티, 때론 패션쇼 혹은 미술 전시회에 초대된 듯 황홀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뮤직비디오들. 내 모니터 해상도가 원래 이렇게 좋았나 착각마저 들게 하는 ‘K-Flexing’으로 가득한 케이팝의 정수를 그저 즐겨주시기를.
CL – +HWA+
NCT U – Make A Wish
몬스타엑스 – FANTASIA
블랙핑크 – How You Like That
아이즈원 – FIESTA
위키미키 – COOL
청하 – Stay Tonight
태민 – Criminal
2020’s K-Taste
케이팝이 세계로 진출하면서 ‘우리의 것’임을 뚜렷이 각인시켜야 할 필요가 오히려 늘어나기 시작했다. 누가 그랬던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전통적 배경과 의상 같은 비주얼과 더불어 케이팝 속에 우리의 정체성을 더 깊게 새긴 뮤직비디오들이 2020년에도 있었다. 굳이 주모를 찾을 필요는 없다. 유튜브의 재생버튼을 클릭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3YE ‘QUEEN’
ACE ‘도깨비’
Agust D ‘대취타’
SuperM ‘호랑이’
2020’s IDEA
케이팝 뮤직비디오라 하면 화려한 영상미와 스케일부터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재치있는 아이디어와 절묘한 편집만으로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작품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독특하고 개성있는 연출이 돋보였던 2020년의 뮤직비디오들을 소개한다.
B1A4 ‘영화처럼’
더보이즈 ‘Christmassy!’
밴디트 ‘Cool’
이수현 ‘ALIEN’ SELF M/V (이수현 개인 유튜브 에디션)
2020’s Universe
이제는 케이팝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된 세계관과 스토리. 그 명맥을 이어가듯 2020년에도 서사가 돋보이는 뮤직비디오들이 있었다. 아주 먼 옛날 머나먼 어딘가에서가 아닌, 지금 당신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야기. 당신을 사로잡을 케이팝 속 세계를 지금 다시 만나보자.
아이즈원 ‘Panorama’
에스파 ‘Black Mamba’
여자친구 ‘교차로’
온앤오프 ‘스쿰빗스위밍’
카이 ‘음 (Mmmh)’
투모로우바이투게더 ‘Eternally’
2020’s Healing
팬데믹으로 침체될 수밖에 없었던 2020년의 케이팝. 하지만 그만큼 우리를 위로해준 노래와, 그에 걸맞는 따스한 영상미의 뮤직비디오도 많았다. 유쾌하게, 때로는 잔잔하게, 보고 있기만 해도 왠지 모르게 힐링되는 작품들을 꼽아보았다. 아직 마무리 되지 않은 하루의 나머지가 잔잔하길 바라며.
DAY6 (Even of Day) ‘파도가 끝나는 곳까지’
NCT U ‘From Home’
밴디트 ‘Children’
아이유 ‘에잇’
엔플라잉 ‘STARLIGHT’
태연 ‘Happy’
핫펠트 ‘Sweet Sensation’
2020’s Chilling
계절감마저 잊은 채 웅크려 보내야 했던 2020년. 그런 와중에도 우리의 귀를 시원하게 뚫어주는 케이팝이 있었기에, 또 노래와 찰떡처럼 어울리는 뮤직비디오가 있기에 버텨낼 수 있었다. 2020년 한 해 동안 청량하면서도 상쾌한 영상미를 뽐내며 흡사 CF를 연상케 한 뮤직비디오들을 모았다. 시원한 탄산 또는 이온음료 한 잔과 함께 감상하는 건 어떨까.
동키즈 I:KAN ‘Y.O.U’
오마이걸 ‘살짝 설렜어’
우주소녀 ‘BUTTERFLY’
에이프릴 ‘Now or Never’
정세운 ‘Say Yes’
크래비티 ‘Cloud 9’
프로미스나인 ‘Feel Good’
2020’s Hottest
때로는 오묘한 분위기만으로 괜스레 낯이 뜨거워지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듯한 뮤직비디오가 있다. 아마도 조명, 온도, 습도 그리고 아이돌까지 모든 요소가 화면 속에서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었기 때문이겠지. 왠지 모르게 혼자 있을 때만 보고 싶은, 2020년 케이팝의 가장 ‘핫’한 뮤직비디오들.
AB6IX(이대휘) ‘ROSE, SCENT, KISS’
김우석 ‘적월’
문별 ‘달이 태양을 가릴 때’
문빈&산하 ‘Bad Idea’
원호 ‘OPEN MIND’
제니어(전지윤) ‘BAD’
2020’s Horror
가끔 순수하다 못해 악의가 깃든 것 같은 장난과 악몽을 꾸게 될 듯한 비주얼로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뮤직비디오가 있다. 클릭만 하면 언제든지 핼러윈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한 해 동안 가장 무서운 케이팝 뮤직비디오들을 모았다. 만약 늦은 밤 홀로 이 리스트를 보게 된다면, 반드시 뒤를 조심하라…! (에코 효과음) (written by 심댱)
T1419 ‘Dracula’ *T1419는 21년 1월 11일에 데뷔한 팀이며, ‘Dracula’는 프리데뷔로 선공개된 작품임을 밝힌다.
VERIVERY ‘Thunder’
네이처 ‘어린애’ (무삭제 ver.) *무삭제 버전으로 다소 잔혹한 표현이 있으니 시청에 유의를 바란다 .
레드벨벳 아이린 &슬기 – Monster
2020’s Holy Moly
당신은 케이팝을 통해 신앙심을 느낀 적이 있는가. 철학적 사유에 빠져본 적은 있는가. 분명히 CCM도 아니고 불경도 아닌데, 뮤직비디오를 보는 것만으로 어째서 이렇게 마음이 벅차오르는 걸까? 출처 모를 철학적 관념, 영문 모를 성스러운 비주얼, 한계를 모르는 사운드의 폭풍이 뒤섞여 자아내는 고양감은 보는 이의 배덕감마저 자극한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같은, ‘Holy’한 뮤직비디오들.(written by 심댱)
(여자)아이들 ‘Oh my god’
여자친구 ‘Apple’
원어스 ‘TO BE OR NOT TO BE’
태민 ‘이데아’
화사 ‘마리아’
2020’s Performance in MV
퍼포먼스 뮤직비디오, 혹은 안무 버전 뮤직비디오란 이제 케이팝 콘텐츠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크게는 전체의 동선부터 작게는 디테일한 동작까지 놓치지 않은 채 방송국 무대 카메라의 한계를 뛰어넘어 안무와 그 수행자들의 매력을 오롯이 담아낸 퍼포먼스 비디오들을 꼽았다. (written by 랜디)
레드벨벳 ”Psycho’ Performance Video’ *레드벨벳 ‘Psycho’는 2019년 12월 23일 발매작이나, 퍼포먼스 비디오는 2020년 1월 8일에 공개되어 결산에 포함했음을 밝힌다.
레드벨벳 아이린&슬기 ‘Episode 1 “놀이 (Naughty)”‘
방탄소년단 ‘ON (Kinetic Manifesto ver.)’
에이티즈 ‘‘THE BLACK CAT NERO’ Halloween Performance Video’
청하 ‘Dream of You (Performance ver.)’
2020’s Teaser
본작에 대한 단순 예고편 격이었던 티저는 노래, 앨범은 물론 아티스트의 인상까지 결정짓는 필수적 콘텐츠로 자리잡았다. 그 자체로 볼거리가 충분한 완결된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케이팝의 티저 영상은 진화해왔고, 2020년은 그 어느 때보다도 티저의 다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한 해였다. 짧은 분량 안에 곡의 하이라이트를 효과적으로 담아내는 기존 방식(트와이스)은 물론, 타이틀곡과 앨범의 콘셉트를 구축하거나(더보이즈, 스트레이키즈, 투모로우바이투게더, 위클리, 청하), 세계관의 단서를 흘리거나(여자친구, 이달의소녀, 크래비티), 수록곡의 스니핏 영상을 선보이기도 하고(NCT 127, 엔하이픈, 카이, 핫펠트), 때로는 앨범과 무관하게 티저 느낌의 자체 제작 콘텐츠를 내놓기까지 했다(더보이즈 ‘Generation Z’). 본식 못지 않게, 혹은 본식보다 더 맛있는 식전 빵처럼 끊임없이 손이 가게 만든 티저 영상들을 소개한다. (written by 스큅)
有緣千里來相會(유연천리래상회). 인연이 있으면 천 리를 가더라도 만난다. 만나야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만나게 된다는 운명론이다. 서로 거리를 두고 만남을 피하게 된 이 팬데믹의 시대에도 만나야 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게 된다.
다수의 대중을 집중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활발한 인터랙티브를 통한 참여형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다. 이 상호 작용만이 줄 수 있는 경험치가 있기 때문에, 대중음악에 있어 공연이란 산업은 물론 음악 자체의 퀄리티 향상과 아티스트의 성장을 위해 필수적이다. 가장 오래된 공연 예술인 연극은 통상적으로 대본(콘텐츠), 배우(퍼포머)와 함께 관객(오디언스)을 필수 3요소로 규정한다. 관객이 없는 공연이란 이론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셈이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존재해온 공연이 사라질 순 없으니, 관객 없이도 공연은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퍼포머는 끊임없이 오디언스를 부른다. 이 콘텐츠는 당신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고 어떻게든 설득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설득하지 않으면 ‘만나지 않음’에 익숙해진 관객이 더 이상 콘텐츠를 경험하려 하지 않고, 경험해오던 습관마저 잃기 쉽기 때문이다. 팬데믹이 장기화하면서, 초기에는 단순히 ‘무관객이라 아쉽다’에 그치던 퍼포머의 소감이 이제는 ‘익숙해질까봐 두렵다’는 불안으로 심화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편리를 위한 적응 상태일 수도 있지만, 누적된 고통에 무감해져 치명적인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CRAVITY] HIDEOUT : PROLOGUE FILM
이런 환경에서 어렵게 데뷔한 크래비티의 첫 번째 3부작은 ‘만남’을 키워드로 전개된다. 앨범 발표에 앞서 공개된 Prologue Film에는 세계관을 설명하고 연결하는 곡이 하나씩 삽입되었다. 1집의 ‘낯섦’, 2집의 ‘Realize’, 그리고 3집의 ‘Call my name’은 서로 떨어져 있던 이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만나게 된다는 서사를 가사와 영상을 통해 표현한다. ‘낯섦’이 고독과 방황을 직접 언급하며 만남 자체를 소구했다면, ‘Realize’에서는 ‘이 낯선 현실도 두렵지 않아, 날 숨 쉬게 한 너와 함께면’이라는 가사로 운명적 만남을 전제한다. 그러나 ‘만남’으로 귀결될 것 같았던 전개와 달리 ‘Call my name’은 여전히 과거의 만남을 회상하며 앞으로의 만남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Realize’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음에도 실질적인 만남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세 번째 Prologue Film의 말미에서는 아홉 명의 크래비티 멤버가 한자리에 모두 모인다. 마지막에 합류한 세 멤버가 먼저 모여있던 여섯 명과 인사를 나누는 장면으로 마무리된 뒤 ‘Call my name’이 정식 발표되었다. 그러니까 이 문장은 세계관 안에서의 서로가 아니라 이제 막 모인 이들이 그들만의 세계 안에서 바깥을 향해 외치는 메시지다. 만날 사람들은 언젠간 반드시 만나게 되므로, 잊지 말고 이름을 불러 달라는 부탁은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지내는 사람이 많아진 시대상과 맞물려 그 어떤 아이돌이 던졌던 어필보다 강렬하게 다가온다.
[CRAVITY] HIDEOUT : PROLOGUE FILM SEASON. 3
그래서 크래비티의 3부작 시리즈 타이틀이 ‘은신처’를 뜻하는 “HIDEOUT”이라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크래비티의 모든 콘텐츠는 빅네임을 과시하기보다는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는 순수한 메시지를 성실하게 전달하는 데에 집중한다. 가시적인 성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콘텐츠의 내용과 퀄리티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팬덤이 형성된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예컨대 지나치게 무거운 주제 의식이나 공격적인 마케팅 구호에 지친 대중에게는 ‘세상에 없던 신선한 것을 보여주겠다’는 야망이나 ‘역대 최고 스케일로 압도하겠다’는 패기보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언젠간 꼭 만나자’는,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동시에 당장은 성사될 수 없는 약속이 그 어떤 슬로건보다도 비현실적인 판타지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팬덤의 다수가 경연 프로그램으로 인해 번아웃한 경험이 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전까지 해오던 절박한 호소보다는 한층 절제된 태도로 일관하는 담담한 메시지가 훨씬 효과적일 수밖에 없다. 직접적으로 ‘힐링’을 표방한 적이 없음에도 이들을 보며 ‘무해하다’, ‘힐링 된다’는 반응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기인할 것이다. 세계관 영상에서나 무대 위에서나, 이들이 가진 초인적인 능력을 과시하기보다는 멤버 간의 상호작용이나 케미스트리를 부각하는 연출을 자주 활용하는 것 또한 이 그룹이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당신이 있어야 완성되는 서사
‘만남’이라는 테마는 여러모로 크래비티 멤버에게 큰 의미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결성 단계에서부터 여러 차원의 우려를 사기도 했던 그룹이었기 때문에 팀워크가 무엇보다도 중요했고, 어렵게 형성한 팬덤을 사수하기엔 비대면의 장벽이 어마무시한 상황이었다. 녹록지 않은 환경에서 내놓은 크래비티의 데뷔곡 ‘Break all the Rules’의 첫 소절은 ‘(Turn it up) 시간이 없어’라는 구호였고, 3부작을 마무리하는 앨범의 타이틀곡 ‘My Turn’은 ‘시간이 됐지 Answer’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무모해 보일 정도로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한 음악은 어쩔 수 없이 ‘언젠가 만나게 될 때’를 기대하게 만든다. 이 팀에 유독 오프라인 라이브 공연을 기대하는 팬들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겠다. 9인조 다인원 그룹만이 만들 수 있는 다이내믹한 포메이션을 통해 속도감을 구현한 퍼포먼스는 물론, 짧은 시간 안에 비약적으로 성장해 이제는 안정적으로 곡을 운용하는 보컬까지 갖춘 크래비티는 누구에게 물어봐도 쉽게 흠을 찾기 힘들 정도로 잘 만들어진 그룹이다. 이런 이들에게 완성도를 더해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세계 밖에 있는, 언젠간 만나겠지만 아직은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서사의 마침표를 이야기 밖에 서 있는 사람이 찍도록 만든, 어찌 보면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참여형 콘텐츠를 만들었다.
CRAVITY 크래비티 ‘My Turn’ MV
크래비티 멤버 원진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 ‘(데뷔 준비 과정에서) 아홉 명의 멤버로 결성이 확정됐을 때 가장 행복했다’고 밝혀왔다. 멤버 정모 또한 최근 인터뷰에서 ‘지난날을 되돌아봤을 때 가장 잊지 못할 순간’으로 ‘처음 멤버가 정해졌을 때’를 꼽았다. 데뷔 자체만큼이나 지금의 멤버들과 함께 하게 된 것을 기뻐했다는 언급은 이들에게 무엇보다 ‘만남’과 ‘(공동체로서의) 우리’가 절실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데뷔 하나만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내던질 것 같은 보통의 아이돌 연습생의 이미지와는 조금 괴리가 느껴지는 태도이자, 동시에 이 팀이 지향하는 바가 남다를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하게 되는 대목이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도 리더 세림은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어도 팀으로 보면 합이 엄청 잘 맞는다’고 팀워크를 어필했다. 신인 그룹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향상심 또한 당연히 있겠지만, 그보다는 서로 다른 점을 찾고 어떻게 상보적인 관계로 만들어나갈지 고민하는 모습에서 막연한 공명심이 아닌 조금 더 섬세한 지향성을 느낄 수 있다. ‘만나야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만나게 된다’. 크래비티는 이 오래된 운명론에 가장 잘 어울리는 팀이고, 그래서 언젠가 마주칠 순간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아이돌로 성장하고 있다.
뮤직비디오와 안무, 음악방송 활동까지 막대한 프로모션이 이루어지는 타이틀곡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기 마련이지만, 앨범 한 귀퉁이에 숨어 있는 보석같은 수록곡들을 찾아듣는 것 역시 케이팝의 주요한 재미다.
아이돌로지는 2020년 주목할 만한 수록곡을 각 작품의 개성과 색깔에 따라 부문을 나누어 추천작 플레이리스트를 구축해보았다. 부문별 플레이리스트는 본문에 첨부한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20’s 인트로
케이팝에서는 앨범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1번 트랙에 타이틀곡을 배치하는 경우가 많지만, 때로는 이 경향을 거슬러 타이틀곡보다도 앨범의 포부를 더 잘 응축해낸 인트로 트랙을 내세우기도 한다. 견고하게 쌓아올린 저마다의 유니버스 속으로 청자를 성큼 잡아끈 2020년의 인트로 곡들을 소개한다.
밴디트 – Carnival
여자친구 – Labyrinth
WOODZ – Lift Up
스트레이키즈 – 토끼와 거북이
핫펠트 – Life Sucks
투모로우바이투게더 – Ghosting
원위 – 미쳤다미쳤어
위클리 – 언니
아이즈원 – Eyes
문빈&산하 – Eyez on U
JBJ95 – SHADUBIDU
하성운 – Lazy Lovers
2020’s 애티튜드
만듦새 이전에 애티튜드 하나만으로 결판이 나기도 한다. 어쩌면 아티스트의 고고한 존재감이 지배하는 그런 곡들이야말로 ‘아이돌’ 팝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래 곡들을 들으며 ‘아이돌’의 품격을 느껴보시길.
보아 – Got Me Good
트와이스 – Hell In Heaven
블랙핑크 – Pretty Savage
드림캐쳐 – Black Or White
NCT U – Misfit
몬스타엑스 – 대동단결
카드 – Inferno
WOODZ – Buck
방탄소년단 – Respect
2020’s 아몰라일단dothedance*
케이팝은 기본적으로 댄스 음악을 지향하지만, 곡 안에 꽉꽉 욱여넣어진 의도들과 목적들을 헤아리다 보면 정작 스텝을 놓쳐버리기도 한다. 다른 목적들을 걷어내고 ‘댄스’와 ‘음악’ 자체에만 집중한 듯한 곡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자, 이제 볼륨을 최대로 높이자.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흔들 수 있도록.
*본 플레이리스트의 제목은 라비의 2016년 믹스테이프 “R,EBIRTH”의 수록곡 제목을 차용한 것임을 밝힌다.
스트레이키즈 – 타
있지 – Ting Ting Ting
블링블링 – 너 나랑 놀래?
NCT 127 – Music, Dance
K/DA – Drum Go Dum
MCND – Galaxy
에이티즈 – 춤을 춰
슈퍼엠 – Drip
2020’s 별안간 벅차오름
듣고 있다보면 별안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어지는 노래들이 있다. 무작정 달음박질을 치고 싶다거나, 허파가 저릿하도록 내적 비명을 지르고 있다거나, 괜시리 허공 너머 저 먼 곳을 올려다보게 된다거나. 솟구치는 정동의 파고를 느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이 곡들을 쉬이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이 노래들을 들으며 오늘도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 들어 흐르지 못하게 또 살짝 웃어…
드림캐쳐 – Break The Wall
에이티즈 – 지평선
업텐션 – Stop The Clock
슈퍼엠 – Step Up
더보이즈 – Salty
우주소녀 – Pantomime
아이즈원 – Mise-en-Scène
드리핀 – Overdrive
에이프릴 – 인형
온앤오프 – 제페토
데이식스 – Love me or leave me
2020’s 청량
젊음을 연소해 다시 없을 반짝이는 순간을 담아내는 아이돌팝에서 청량함은 가장 강력한 형태의 판타지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최근 강렬하고 무게감 있는 콘셉트가 주류를 이루는 케이팝 트렌드에 아쉬움을 표하는 의견이 많아졌지만 (작년 하반기부터는 보이그룹을 중심으로 이를 의식한 듯한 움직임이 나타나기도 했다), 사실 청량한 아이돌팝은 줄곧 꾸준히 나오고 있었다. 이를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지나쳤을 수 있을 당신을 위해 2020년의 청량 케이팝 플레이리스트를 준비했다.
더보이즈 – 환상고백
여자친구 – Three of Cups
골든차일드 – H.E.R.
박지훈 – Paradise
아이즈원 – Dreamlike
AB6IX – Vivid
크래비티 – Cloud 9
트와이스 – Oxygen
투모로우바이투게더 – Wishlist
NCT DREAM – 사랑은 또 다시
로켓펀치 – TWINKLE STAR
이달의 소녀 – 땡땡땡
2020’s 서정
소위 ‘타이틀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타이틀곡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차곡차곡 쌓아올린 서정이 빛나는 수록곡들을 찾아듣는 것 역시 케이팝의 주요한 재미다. 때로는 세심하게, 때로는 투박하게 마음을 헤집어놓은 수록곡들.
러블리즈 – 절대, 비밀
오마이걸 – 꽃차
세븐틴 – 좋겠다
정세운 – O
NCT 127 – 우산
펜타곤 – 빗물샤워
백현 – Bungee
태민 – 네모
마마무 – 잘 자
태연 – 너를 그리는 시간
유아 – End of Story
2020’s Mood for Jazz
케이팝씬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알앤비 장르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소울, 그리고 재즈와 맞닿뜨리게 된다. 2020년 한국산 가요에 이 요소를 근사하게 어우른 곡들을 골라보았다. (written by 랜디)
공원소녀 – 공중곡예사
NCT U – Dancing In The Rain
엔플라잉 – 아무거나 (I’M GONNA)
보아 – All That Jazz
드림캐쳐 – Jazz Bar
레드벨벳 아이린&슬기 – Diamond
준케이 – 집
2020’s To Fans
관습이라고도 할 수 있을 케이팝의 팬송이 인사치레를 넘어선 모종의 감흥을 이끌어내는 것은 결국 아티스트마다 각기 다른 목소리와 화법 때문일 것이다. 비슷하고도 또 다른, 웰메이드 팬송들을 한 데 모아보았다.
위키미키 – The Paradise
온앤오프 – Message
세븐틴 – 겨우
시그니처 – 힝힝 (Hing Hing)
태민 – Pansy
에이핑크 – 너의 모든 순간을 사랑해
2020’s To Me
무대 바깥의 청중에게 에너지를 발산하는 곡이 주를 이루는 케이팝에서 노래가 가리키는 방향이 ‘나’로 수렴하는 곡들을 마주할 때면 속절없이 마음을 내주게 된다. 단단한 자존과 응원을 담은 곡들을 지지하며.
방탄소년단 – 병
에이핑크 – Be Myself
보아 – Little Bird
세정 – Skyline
트와이스 – Believer
여자친구 – Night Drive
핫펠트 – Bluebird
2020’s 아웃트로
첫 페이지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마지막 페이지다. 마지막 구절을 읽어내리는 쾌감을 다시 느끼기 위해 읽었던 책을 재차 집어드는 사람도 적지 않을 터. 앨범에도 마찬가지로 준수한 마지막 트랙을 맞닥뜨리는 쾌감이 존재한다. 지난 트랙들을 갈무리하기도 하고 의외의 반등으로 신선한 인상을 남기기도 하며 앨범을 말끔하게 포장한 아웃트로 곡들을 모았다.
노래와 퍼포먼스의 불가분성을 이야기하기가 새삼스러우리만치 현재의 케이팝에서 퍼포먼스의 중요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다. 2019년 결산에 이어 <아이돌로지>는 작년 한 해 우리를 감동시킨 ‘퍼포먼스 Pick!’을 모아보았다. 순서는 ABC-가나다 순.
NCT U – Make A Wish
스큅: ‘Make A Wish’는 넓은 멤버 풀(pool) 가운데 곡에 맞추어 멤버 구성을 달리한다는 NCT U 포맷의 효용을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실하게 각인시킨 곡이다. 관능적인 휘파람 소리 아래 루카스와 재민이 각각 열정과 냉정으로 퍼포먼스의 기강을 세우면, 다수의 NCT U 유닛을 이끌어왔던 태용, 재현, 도영이 탄탄하게 길을 닦고, 압도적인 완급조절의 장력(壯力)으로 기량을 뽐내는 새 멤버 쇼타로가 펀치를 날리면, 유려한 선의 샤오쥔이 재간을 피우며 극적인 활력을 불어넣는다. 어느 하나 낭비되거나 남용되는 멤버 없이 완벽한 캐릭터 운용을 보여주는 7명의 퍼포먼스는 갖은 풍파와 제약 가운데서도 NCT U라는 포맷이, 그를 넘어 ‘네오 컬쳐 테크놀로지’라는 그룹의 표어가 지탱될 만한 근거를 몸소 제시한다. NCT의 미래를 계속해서 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 퍼포먼스에 담겨 있다.
더보이즈 – 괴도 (Mnet <로드 투 킹덤>)
스큅: <로드 투 킹덤>은 관중이 사라지고 오로지 아티스트와 무대만 남은 자리에서 케이팝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탐구한 프로그램이었고, 그중에서도 더보이즈의 ‘괴도’는 <로드 투 킹덤>을 넘어 향후 숱한 비대면 퍼포먼스에 하나의 표준을 제시한 무대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더보이즈는 엑소 ‘으르렁’, 동방신기 ‘수리수리’, 소녀시대 ‘Holiday’와 같은 일부 곡에서 일시적으로 시도되었던 360도 무대 활용을 본격화하고 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다. 뮤지컬 <시카고>의 ‘Cell Block Tango’에서 모티브를 얻은 도입부 이후 <로드 투 킹덤>을 재패하겠다는 호기로운 경고장이 던져지면, “로드 투 킹덤”를 형상화한 기다란 무대를 지나 메인댄서 큐가 독무를 펼치고, 독무를 270도로 훑고 난 뒤 프레임에는 11인의 멤버들이 담긴다. 관객석이 없어진 만큼 넓어진 무대 공간 곳곳에 현란한 아이디어와 안무를 흩뿌리고 이를 밀도있게 엮어낸 1분여의 오프닝 시퀀스는 뒤이어질 퍼포먼스의 티저에 불과하다. 더보이즈는 항공 캠까지 동원한 다각도의 카메라워크에 맞춰 그룹의 강점으로 꼽혀온 깔끔하게 제련된 군무를 선보이며 무대를 입체적으로 조직해나간다. 기예 수준의 고강도 동작은 물론, 왕관, 탁자 등 오브제를 착실하게 회수하며 서사를 완결하는 짜임새 역시 탁월하다. 첫 시작이 ‘괴도’가 아니었다면 ‘Reveal (Catching Fire)’, ‘도원경 (Quasi una fantasia)’, ‘Checkmate’, <2020 MAMA>의 ‘The Beginning of the End (Reveal + Checkmate)’로 이어지는 걸출한 연작도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보이즈의 군더더기 없는 수행력, 안무가 백구영, 김석찬, 박성령의 창의적인 연출, 크레커 엔터테인먼트의 아낌없는 투자 삼박자가 맞아떨어진 최상의 결과물. 몇 년 째 도의마저 저버리는 아이돌 경연 프로그램이 결국 참가자들의 투혼으로 지탱되는 구도를 목도하며 착잡해지기도 하지만, 분명 빼어난 퍼포먼스와 그에 투여된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은 존중받고 인정받아 마땅하기에 더보이즈의 ‘괴도’를 주저 없이 올해의 퍼포먼스로 꼽고 싶다.
레드벨벳 아이린&슬기 – 놀이
스큅: 1년에 3~4번 컴백을 할 정도로 주기가 빨라진, 돈 투자보다 시간 투자가 어려운 근래의 아이돌팝에서 근성의 결과물이 나오기란 생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 되었다. 하지만 신문물을 들여오는 데에는 그만한 품이 드는 법. ‘놀이’는 보기 드문 근성으로 케이팝 퍼포먼스의 폭을 확장한 작품이다. 안무 제작에만 2개월, 기본기 트레이닝 1개월을 포함한 안무 트레이닝과 후보정 작업에만 4개월을 들여 완성했다는 텃팅 퍼포먼스는 경탄을 자아낸다. 냉정하게 뚝뚝 떨어지는 박자와 조소를 날리는 듯한 시니컬한 멜로디를 가르는 관절들의 세밀한 운신은 그 유명한 ‘손가락 권법’처럼 작은 움직임만으로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지닌다. 디테일한 움직임으로 결정되는 만큼 타이트한 카메라 샷이 주를 이루는데, 이러한 퍼포먼스의 특징은 실제 관객보다 카메라를 매개해 스크린 너머의 관중에게 어필하는 일이 많은 (특히 현 시국의) 아이돌팝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이는 카메라 트릭을 활용한 퍼포먼스가 더욱 큰 쾌감을 주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후렴구 안무를 계속해서 다르게 구성하며 반복을 최소화한 구성은 스크린 너머 청중의 주의를 1초도 흐트러뜨리지 않겠다는 야심으로 가득하다. “날 감당할 수 있겠니”라는 도발에 탄복할밖에.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챌린지’ 안무가 아닐까.
방탄소년단 – On
랜디: 방탄소년단은 분명 현재 케이팝 시장의 절대 강자이지만, 트렌드세터보다는 외골수의 인상이 강하다. 유행가를 만들어도 결국은 그들이 당시 골몰하는 메시지를 부어 넣어 고집스럽게 방탄소년단의 표식을 새겨넣고 만다. ‘ON’은 음악부터 퍼포먼스까지 그 표식 그 자체인 곡이다.
‘Dionysus’에 이어 또 한 번 안무가이자 댄서인 시에나 라라우와 함께 했다. ‘Dionysus’가 디오니소스의 예술에 잔뜩 취한 ‘광기’를 주제로 했다면 ‘ON’은 두려움을 온몸으로 들이받는 ‘결기’다. 바닥에 내딛는 발구름이나 상체의 팝 하나하나에 엄청난 힘을 싣는다. 본래도 방탄소년단은 몸이 부서져라 추는 느낌으로 유명했는데, ‘ON’은 그 특징을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마칭밴드 드럼 롤에 대형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방탄소년단 멤버들은 그 종횡 열 사이를 헤치고 모인다. 분명 클린하게 동작을 맞추고 있는데도 보고 있자면 균질한 느낌보다는 개개인의 생동감이 서로 엉켜 만드는 거대한 시너지가 먼저 느껴진다. 군악을 모티브로 했지만, 제복을 갖춰 입은 정식군이 아니라 마치 혁명군 같다. 댄스 브레이크에서 비트가 변주하면 이 혁명군은 트라이브가 된다. 이 기세를 몰아 마지막 후렴까지 전력으로 춤춘다. 기력을 남김없이 다 써버리고는 서로 의지한 채 허공 높은 곳을 보는 뒷모습으로 끝을 맺으면, 불과 화면으로 관전했을 뿐인데도 내 몸이 다 저릿저릿한 탈력감과 숙연함을 느낀다.
최고의 무대로는 새벽 시간 뉴욕 그랜드 센트럴 역을 빌려서 찍었다는 <투나잇쇼 위드 지미 팰런>을 꼽고 싶다. 현재는 안타깝게도 비공개 상태다. 후에 유튜브에 재공개 된다면 필히 일감할 것을 권한다.
세븐틴 – Left & Right + HOME;RUN (Mnet <2020 MAMA>)
마노: 연말 시상식 무대라고 하면 으레 기대되곤 하는 요소들이 몇 가지 있다. 장중한 인트로, 빡빡할 정도로 힘을 준 어레인지, 보기만 해도 혀가 내둘러지는 댄스 브레이크 구간, 빳빳하게 각 잡힌 제복 스타일의 의상 같은. 일종의 ‘올스타전’인만큼 내로라하는 라인업 사이에서 어떻게든 새롭고도 ‘멋진’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에 의한 것이겠지만, 몇 시간을 지켜보는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자칫 피로감을 느끼기에 십상인 상황. 2020 MAMA를 시청하던 시청자들 대다수도 아마 그러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을지 모른다. 세븐틴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세븐틴의 상징이며 뮤직비디오에도 숱하게 등장해온 모티브인 다이아몬드를 손에 들고 나타난 버논이 스프레이를 흔들며 무대를 형형색색으로 물들이는 순간, 세븐틴이 10분여 되는 시간 동안 보여줄 퍼포먼스의 방향성은 확실해진다. 멤버들의 옷차림 역시 컬러풀하고 캐주얼하다. 댄서들을 동원해서 선보이는 군무는 빡빡하게 각 잡힌 대신 힘을 뺀 듯 자유분방하고 가볍다. 제목으로 붙여진 ‘Door to Youthtopia’가 표방하는, 자유로운 청춘 군상 그 자체를 그려낸다. 세븐틴이 무대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동안, 왠지 모르게 숨구멍이 트인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세븐틴의 무대는 편하고 캐주얼하게만 끝나지 않는다. 무드를 바꾸어 정장을 빼입고 구두를 신은 멤버들은 ‘HOME;RUN’의 스윙 재즈 리듬에 맞춰 한 편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같은 무대를 선보인다. 몇십 명의 댄서들과 함께 일사불란하게 호흡을 맞추면서도 해맑은 발랄함을 잃지 않는 세븐틴의 표정은, 블록버스터급 스케일의 무대라고 해서 꼭 무게 잡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스케일이 크면서도 가볍고 산뜻한 무대를 해낼 수 있다는, 쉬워 보이지만 누구나 선뜻 하지는 못하는 그것을 세븐틴은 해낸다.
아이즈원 – Fiesta
서드: 아이즈원의 군무는 늘 12명이라는 다인원 팀이어야 할 이유를 납득시켜왔고, ‘Fiesta’는 그 확인 서명 같은 퍼포먼스다. 만개하는 꽃과 축제라는 이미지를 빠른 리듬 위에 시각화해낸 안무는 화려한 사운드에 걸맞게 심심할 틈이 없다. 팔과 다리를 쭉 뻗는 동작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해 최장신과 최단신 멤버의 신장 차이가 상당히 큰 팀임에도 대칭 구도의 균형감이 무너지지 않도록 안배되어있으며, 파트마다 멤버가 최소한 한 번 이상 중앙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도록 섬세하게 구성되어있다.
‘Fiesta’의 퍼포먼스에서 특히 눈에 띄는 점은 방향성의 활용이다. 다리를 뻗으며 앉았다 일어나고, 대형을 넓게 펼쳤다가 다시 가운데로 모이기도 하면서 상하좌우로 무대를 활용한다. 후렴에서의 턴 동작이나 엔딩 부분의 고개를 돌려 머리카락을 회전시키는 동작 또한 시각적으로 끊임없이 움직임의 변화를 주어 지루할 틈 없이 보는 이를 매료시킨다. 열두 명이 시간차로 팔다리를 뻗으면서도 박자를 맞추는 칼군무는 때론 눈을 의심하게 만들기까지 하는, 새삼스레 이들의 연습량과 팀워크를 선명히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오직 노래에 가장 어울리도록 구성된 춤의 움직임 그 자체로 매력을 100%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아이즈원의 ‘Fiesta’는 K-POP 걸그룹 퍼포먼스에 또 하나의 모범사례로 남을 만하다.
온앤오프 – It’s Raining (Mnet <로드 투 킹덤>)
마노: 흔해 빠진 말이지만,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격언을 굳이 가져오고 싶다. 마치 계단처럼 차근차근 상승세를 밟아올라간 팀의 포텐셜과 에너지가 기어코 정점을 찍은 배경에, 무엇보다 후회없이 무대를 즐기자는 팀의 긍정이 언뜻 엿보이기 때문이다. 후회없이 즐긴 그 결과물이 팀에게 가져온 값진 결실을 생각하면 (온앤오프는 본 경연 미션에서 전체 1위를 기록했다) 더더욱 저 오랜 격언의 의미를 되새겨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여섯 명의 멤버들은 그 누구보다 무대 그 자체를 진정으로 즐기는 듯 보인다. 너무도 당연한 소리 같지만, 수행자가 진정으로 즐기지 않는데 어떻게 보는 이까지 설득하고 매료시킬 수 있겠는가 말이다.
또 다른 설득점은 음악에도 있다. 원곡에서 과할 정도로 흘러넘치던 윤기와 습기를 최대한 씻어내고 대신 뽀송뽀송하고 산뜻한 새 옷을 입힌 편곡은, 만일 그런 상이 있다면 ‘올해의 편곡상’이라도 기꺼이 쥐여주고 싶다. 기발표곡 ‘Complete’의 색소폰 리프를 포인트로 첨가한 것은 가히 ‘신의 한 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발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흥청망청한 에너지를 뿜어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무대가 부득이 언택트로 진행되어야만 했던 것이 못내 아쉬워질 정도.
그러나 한편으로 본 무대는 언택트 시대의 새로운 무대 연출법을 상당히 영리하게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새빨간 장막이라는 소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마치 1인칭 게임처럼 퍼포머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카메라 워크는 시청자가 무대에 직접 참여하는 듯한 입체감과 몰입감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적재적소에서 장막 사이로 멤버들이 등/퇴장하는 연출은 뮤지컬의 그것이다. 거기에 피날레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대형 군무까지. 이 무대를, 이 편곡을, 이 팀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위클리 – Tag Me
스큅: 시작과 동시에 노래 가사처럼 “쟨 뭐니”를 외치게 된다. 신세대 아이돌 그룹의 신선함이 곧바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위클리의 ‘Tag Me’는 본격 뮤지컬 형식의 퍼포먼스를 표방하며, 무대 위에 교실을 옮겨와 한바탕 소란을 피우며 시작하는 퍼포먼스는 짜인 안무보다 멤버들의 연기에 상당한 비중을 내어준다. 후렴구를 제외하고는 멤버들이 통일되지 않은 각기 다른 표정과 모션을 취하고 있는 때가 많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빠른 호흡의 파트 분배로 만담을 나누는 듯한 노래 구성에 맞춰 멤버들이 곳곳에서 푱푱 튀어나오는 핑퐁식의 구성은 “SNS를 일상적인 놀이터 삼아 뛰노는 여느 신세대의 소란한 활기”를 효과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군무에서는 데뷔곡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깔끔한 합도 돋보이며, (다소 뜬금없지만) 스웨거를 과시하는 브레이크 파트에서는 신인의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는 패기가 읽힌다. 세븐틴의 ‘아낀다’를 처음 봤을 때의 신선한 충격이 떠오르기도. 아이돌이 세대를 노래한다면 자고로 이래야 한다는 귀감이 될 만한 퍼포먼스다.
위키미키 – Cool
랜디: ‘이거지!’ 하는 감탄을 멈출 수 없는 무대. 근래 숱한 걸그룹들이 이런 밀리터리 부츠, 점프수트, 카고팬츠, 묵직한 EDM, 자신만만한 가사 등으로 컨셉 선회를 꿈꿨지만 가장 성공적인 전이를 이뤄낸 팀은 위키미키라 꼽고 싶다. 일명 ‘틴크러시’를 표방하던 데뷔 초 노선부터 특유의 스포티함과 역동성이 있었던 팀이기 때문에 더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섹션마다 뮤지컬리티를 잘 살린 안무가 돋보인다. 20세기 슈퍼모델 포토슛에 나올 것 같은 드라마틱한 신스와 하우스 비트에 맞춰 모델처럼 워킹하거나 포징(Posing)을 할 때 여덟 명 다인원의 강점이 십분 살아난다. 잠시 메이저로 전조하며 멜로디 선율을 강조하는 파트에서는 가창자(1절은 수연, 2절은 도연)를 제외한 전원이 앉거나 뒤돌아서서 센터를 주목시켰다가, 이렇게 끌어모은 시선을 빌드업으로 전환하며 코러스로 달려 올라간다. (0:40) 무게 중심이 위에서 중심으로 또 아래로 쉴 새 없이 움직이고 풋워크도 많은 어려운 안무이나 전원이 흐트러짐 없이 이를 잘 맞춰낸다. 파트 연결구마다 자주 등장하는 바디 롤 동작은 텐션을 팽팽하게 감는 역할을 한다. 안무 완성 메이킹 영상을 보면 바스트 중심의 바디 롤을 좀 더 호전적인 느낌의 어깨 롤로 바꾸는 등,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디테일 수정에 참여하며 만들어낸 무대임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포인트는 코러스 직전의 빌드업에서 1절에선 루아가, 2절에선 유정이 카리스마 있게 시선 집중을 시켜놓고 그대로 빙 돌아 걸어 들어간다는 점. 그러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워낙에 조밀하게 짜여있는 안무이다 보니 이 부분의 90년대 방송 안무 같은 뉘앙스가 유독 튄다.
곡의 만듦새부터 무대 구성까지, 관객과 만나기도 어려웠던 2020년 단 3주만 활동하고 접기에는 아까운 곡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곡으로는 한 일 년씩 활동해주면 좋겠는 심정이다.
있지 – Wannabe
랜디: 멤버들이 워낙에 걸출한 댄서들이기에 가능했을, 다시 봐도 말도 안 되는 안무다. 초장부터 류진의 16비트 어깨 동작으로 기선을 제압하고 들어가며, 곧장 멤버 전원이 같은 수준의 아이솔레이션으로 같은 동작을 해내는 모습에 입이 떡 벌어지고 만다. 4박의 하우스 리듬 위로 프레임 수가 두 배, 네 배는 많은 동작들이 지나간다. 태엽이나 스프링 소리 같은 사운드 소스에 반응하는 기민한 디테일과 온몸을 내던지듯 쓰는 큼직큼직한 동작들이 정신없이 교차하는 고난도의 안무지만 이들은 단순한 동작 소화에서 그치지 않는다. 엄청난 박진감이 느껴진다.
있지는 함께 서는 댄서들 없이 오로지 다섯 명으로 무대를 꽉 채운다. 이는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반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채령처럼 상체를 우아하게 쓰며 화려한 헤어 플립으로 무대 상부를 채우는 멤버가 있다면 예지처럼 아래 무게 중심을 딱 잡고 전체 하부를 지휘하듯 운용하는 멤버도 있다. 다섯 명이 같은 동작으로 움직여도 멤버 별 스타일의 차이가 전체적인 시야 위아래를 빈틈없이 채운다. 단순히 각을 맞추는 정도에서 나오지는 않는, 각자의 내공이 어우러져 만드는 시너지다.
청하 – Play
스큅: 다양한 성별과 장르의 교차점 위 가장 중립적인 지대를 점하는 청하는 이 ‘Play’의 호스트로서 자리한다. 호스트 청하는 힙합부터 비보잉, 하우스, 삼바까지 <댄싱9> 올스타전을 방불케 하는 다채로운 댄서들을 끌어들여 흥겨운 춤판을 벌인다. (여담이지만 실제 <댄싱9> 참가자였던 왁커 최리안이 안무를 짜고 댄스스포츠 선수 김홍인이 댄서로 참여했다.) 군계일학이 아닌 낭중지추가 되길 택하는 결단은 그를 도리어 더욱 빛나게 만든다. 왁커다운 남다른 손과 팔의 활용은 물론 힘찬 스텀핑과 바디 롤, 까다로운 리프트, 삼바 롤 동작까지 그때그때 함께하는 댄서에 맞춰 몸놀림을 자연스럽게 동기화하는 수용성은, 파소도블레에서 힌트를 얻은 듯한 케이핑 동작이 시사하듯, 결국 이 플로어를 거느리는 주인이 청하임을 분명히 한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를 댄서들에게 내주고도 그의 존재감이 돋보일 수 있는 이유다. 댄서들을 꾸준히 ‘백댄서’가 아닌 ‘(백업) 댄서’로 호명해온 청하의 애티튜드가 빛난다.
크래비티 – Break all the Rules
조은재: 소녀시대, 트와이스 등 9인조 그룹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중은 9인조를 제법 많은 인원으로 여긴다. 그러나 퍼포먼스를 연출하는 방식에 있어 9인조는 10인 이상 그룹보다 안정적이고 전통적인 형태의 군무를 만들기 쉬우며, 이는 곧 6~8인조 그룹이 가지는 특징이기도 하다. 크래비티는 이 장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있는 그룹이며, ‘Break all the Rules’의 안무는 그중에서도 가장 잘 짜여있다. 곡의 파트 분배에 맞춰 기계적으로 움직이기보다, 파트 싱어를 포함한 모두가 노래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완결성 있는 퍼포먼스를 수행한다. 숨 가쁘게 달리는 빠른 비트에 맞춰 자잘하게 쪼개진 동작에 집중하다 보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재배치되는 다양한 대형에도 자연스럽게 시선이 옮겨진다. 뮤직비디오에 등장했던 큐브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멤버들은 모였다가 퍼지기를 반복하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동선으로 훌륭한 수행력을 보인다. 많다고 여겨지기 쉬운 인원의 멤버를 골고루 대중에게 소개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구성으로, 그 어떤 데뷔곡 퍼포먼스와 비교해도 손색없다.
태민 – Criminal
스큅: 손을 결박한 채로 진행되는 1절 안무, 중간중간 공허하게 허공을 응시하는 시선, 미라처럼 팔을 내뻗는 동작들. 관중보다는 노래 속 “Criminal”을 앞에 두고 펼치는 듯한 퍼포먼스는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는 듯하다. ‘Move’와 ‘Want’가 한층 극화되어 나타난 결과물이라는 느낌도 든다. ‘Criminal’의 높은 몰입감은 태민이 그려오던 원초적인 “느낌적인 느낌”에 실체가 부여된 데에서 오는 압도감에 기인하기도 할 것이다. “더 망쳐줘”(혹은 “도망쳐줘”) 4글자로 폭발해 장렬히 산화하는 후반부의 흐름은 “아프면서 황홀”한 미혹을 흡사 성화처럼 숭고하게 펼쳐 보인다. 십자가에 매달리는 듯한 자세로 마무리되는 퍼포먼스를 보며 예수의 유언 한 마디가 떠오른다. 아, “다 이루었도다.”
트와이스 – More And More
스큅: 티저로 공개된 20여 초의 도입부만으로 압도적이었던 ‘More And More’의 퍼포먼스는 그룹 트와이스의 정수를 보여준다. 110 BPM이 채 되지 않는 박자를 잘게 쪼개 분주하게 발을 놀리고 팔다리를 곧게 내뻗는 움직임은 ‘Signal’의 통통 튀는 리듬에 ‘Fancy’의 질주 본능을 탑재한 듯하다. 자칫 산만해지기 쉬운 안무지만, 기합이 바짝 들어간 듯 일사불란한 멤버들의 합은 리듬감과 질주감 둘 중 어느 쪽도 놓치지 않고 퍼포먼스를 착실하게 쌓아나간다. 박력과 여유가 동시에 느껴지는 팽팽한 텐션은 이제 트와이스의 전매특허라 해도 좋지 않을지. 한편으로는 ‘굳이 이렇게까지 어려울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2019년부터 이어진 그룹의 전진에 박차를 더하겠다는 결의라 생각한다면 납득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연은 ‘I Can’t Stop Me’ 컴백 라이브에서 그간 어려운 안무를 하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해왔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데뷔곡 ‘우아하게’의 댄스 브레이크에 한층 무게감을 실은 듯한 댄스 브레이크에서는 투지마저 느껴진다. 트와이스의 프로페셔널리즘이 읽히는 퍼포먼스.
펜타곤 – Dr. 베베
조은재: 드라마틱한 전개가 인상적인 곡과 어울리게 뮤지컬을 보는 듯한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연기하는 배우 한 명 한 명을 조명하는 스포트라이트처럼, 구간마다 보는 이가 집중해야 할 부분을 확실하게 강조한다. 적은 인원의 그룹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백업 댄서를 통해 스케일을 확장하고, 그만큼 넓어진 무대를 곡이 가진 서사로 채워놓음으로써 뮤직비디오, 그리고 전체 앨범 컨셉과의 연계성 또한 갖추고 있다. 곡의 주제와 컨셉이 ‘광기’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것에 비해 퍼포먼스는 놀랍도록 이성적으로 깔끔하게 설계되어 있으며, 연기 또한 정교하고 절제된 톤으로 수행되고 있다. 메인 댄서 한두 명의 ‘신들린 연기’로 짧은 무대를 압도하려고 하기보다는 대극장 뮤지컬처럼 타이트하게 짜 맞춰진 퍼포먼스로 조금 더 클래시컬한 무드의 공연을 긴 호흡으로 보여준다. 어느새 중견급으로 성장한 멤버들의 탁월한 연기력 또한 주안점으로 둘만한데, 특히 클라이맥스에서 뒤로 쓰러지는 고난도의 동작을 선보인 키노의 발군의 실력이 빛난다.
‘셀프 타이틀 앨범(self-titled album)’이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앨범을 발매하는 아티스트의 이름이나 팀명을 그대로 앨범명으로 삼는 것이다. 보통은 데뷔 앨범이거나 아티스트의 커리어에 전환점을 마련하는 앨범, 또는 어떠한 상징성을 띠는 앨범일 경우 해당 아티스트의 이름 혹은 팀명을 타이틀로 붙이곤 한다. 온앤오프는 사상 첫 정규 앨범을 발매하며 과감하게 앨범 타이틀에 ‘ONF’라는 자신들의 팀명을 내걸었고, 거기에 ‘MY NAME’을 덧붙였다. 일종의 셀프 타이틀 앨범인 셈이다. 데뷔 이래 첫 정규 앨범이라는 상징성도 있거니와, 지금껏 차근차근 공들여 쌓아온 디스코그래피의 한 정점을 찍었다는 자부심으로도 읽힌다. “우리 온앤오프만의 아이덴티티가 진하게 느껴지는 앨범(MK)”, “우리 온앤오프의 아이덴티티가 집약적으로 들어간 앨범(제이어스)”이라고 멤버들이 자평했던 것처럼.
사진=WM엔터테인먼트
그래서인지 2월 24일 “ONF: MY NAME” 온라인 프레스 쇼케이스 현장에 임한 온앤오프 멤버들의 표정도 하나 같이 상기되어 있었다. 어느덧 여섯 번째 쇼케이스, 슬슬 익숙해졌을 법도 한데 “긴장된다”, “떨린다”는 말을 입에 올리곤 했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기분 좋은’ 긴장감이라고 할까. 부정적인 의미로서 마냥 긴장하기만 한 것이 아닌, 본인들이 선보일 결과물에 대한 자부심과 기대감이 섞인 것처럼 느껴졌다. 멤버들의 소감에서도 그런 부분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다. 이션은 “정규 앨범이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이번 앨범을 낸 게 꿈을 하나 이룬 것 같고 감사하다”고 남다른 감회를 밝혔고, MK는 “처음으로 선보이는 정규 앨범인 만큼 정말 새롭게 데뷔하는 것처럼 초심을 가지고 준비했다”는 다소 비장한 각오를 내비쳤다. ON팀 리더 효진 역시 “너무나도 기다려왔던 첫 정규 앨범인 만큼 더 좋은 음악과 무대를 보여드리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고 작업에 임했다”며 소회를 밝혔다.
온앤오프 제이어스, “컬러풀하면서도 에너제틱한 온앤오프의 다채로운 매력을 느낄 수 있으니까 우리의 무대를 통해 많이 기대해주시면 좋겠다” | 사진=WM엔터테인먼트
‘긴장’ 다음으로 많이 언급된 단어가 있다면 아마 ‘에너제틱’이 아닐까. 타이틀곡 ‘Beautiful Beautiful’에 대해 메인 댄서 유는 “외출을 자제하느라 답답하실 많은 분들을 위해 에너제틱한 무대를 준비했다. 우리의 무대 그리고 노래를 들으면서 힘과 ‘뷰티풀 뷰티풀’한 신나는 에너지를 느꼈으면 좋겠다”고 힘든 시기를 함께 지내는 이들에 대한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앨범 콘셉트에 대해 “컬러풀하면서도 에너제틱한 온앤오프의 다채로운 매력을 느낄 수 있”다고 OFF팀 리더 제이어스가 귀띔한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 멤버들의 코멘트처럼 온앤오프는 기분 좋은 청량감과 쾌활하고 낙관적인 에너지로 ‘Beautiful Beautiful’의 무대를 가득 채웠다. “이 곡을 듣는 분들이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고 더욱 아름답게 느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는 효진의 말처럼, ‘지금, 여기’ 존재하는 스스로를 긍정하는 메시지가 돋보이는 곡이었다.
양질의 앨범을 뚝심 있게 발매해오며 ‘명곡 맛집’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온앤오프. 그러한 타이틀에 부담을 느낄 법도 하지만, 멤버들의 표정은 오히려 자신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더 좋은 노래와 무대를 보여드리기 위해서 부담을 많이 가졌는데, 그런 부담이 오히려 관심과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했다(이션)”, “이번 앨범이 우리 온앤오프가 그려왔던 것처럼 잘 만들어진 것 같아서 이번에 많은 기대 해주셨으면 한다(와이엇)”는 멤버들의 말에서도 본인들의 음악에 대한 남다른 자신감과 자부심이 엿보였다. 데뷔 이래 꼬박 여섯 장의 앨범을 함께 작업해온 프로듀싱팀 모노트리에 대한 이야기 역시 빠지지 않았다. “황현 프로듀서와는 사실 데뷔 때부터 쭉 작업을 함께 해왔기 때문에 호흡적인 부분에서는 너무도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MK)”, “(선공개곡 ‘My Name Is’에 대해) 황현 프로듀서께서 주신 주제가 ‘자기소개’였는데, 가사적인 부분은 우리 온앤오프에게 거의 백 퍼센트 맡겨주셨다(제이어스)”는 코멘트에서 아티스트와 프로듀서 사이에 놓인 두터운 신뢰와 끈끈한 유대를 읽어낼 수 있었다. 당연한 말일지 모르지만, 이러한 상호신뢰가 있었기에 ‘명곡 맛집’이라는 타이틀 역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온앤오프 효진, “이번 타이틀곡 ‘Beautiful Beautiful’을 듣고 많은 분들이 일상 속에서 큰 힘을 얻게 됐으면 좋겠다” | 사진=WM엔터테인먼트
온앤오프는 지난해 방영된 Mnet <로드 투 킹덤>을 통해 드라마틱한 성장 서사를 그려내며 ‘계단돌’이라는 타이틀 역시 얻기도 했다. 계단을 오르듯 꾸준히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며 결국은 1위까지 쟁취해낸 바 있는 온앤오프의 멤버들은 각자의 포부와 목표를 당찬 어조로 서슴없이 밝혔다. “이번 활동을 통해서 많은 대중분들과 ‘퓨즈(팬클럽 명칭)’분들이 ‘온앤오프는 한 단계 한 단계 자신들만의 색으로 성장하고 있구나’ 라고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MK)”이며, “대중분들에게 ‘믿고 듣고 보는 아이돌’이라는 ‘믿듣보돌’로 불리는 것이 목표(와이엇)”라고. 효진은 거기에 덧붙여 “‘이 그룹은 어떤 장르도 아닌 온앤오프라는 하나의 장르를 하는 친구들이구나’라는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고 싶다. 또한 이번 타이틀곡 ‘Beautiful Beautiful’을 듣고 많은 분들이 일상 속에서 큰 힘을 얻게 됐으면 좋겠다”면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는 그룹이 되고 싶고 음악 방송에서 1위도 해보고 싶다”는 구체적이고 야심찬 목표를 드러내기도 했다. 말하면 이루어진다는 속설 덕일까, 온앤오프는 지난 2일 SBS MTV <THE SHOW>에서 ‘Beautiful Beautiful’로 첫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온앤오프가 앞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그들만의 음악적 세계관을 유감없이 펼쳐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알립니다. <아이돌로지>는 월 3회 아이돌팝 신보 전작을 리뷰하던 1st Listen 체제를 2021년 부로 월 1회 주목할 만한 아이돌팝 신보를 꼽아 싱글과 앨범으로 나누어 리뷰하는 Monthly 체제로 개편합니다. 이에 따라 1st Listen 체제 하에 있었던 Pick! 제도는 사라지며, Discovery! 제도는 계속 유지될 예정입니다. 아이돌로지에 많은 관심 가져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2021년 1월 아이돌팝 발매작 중 정규앨범을 중심으로 주목할 만한 앨범을 다룬다. 정세운, MCND, 빅톤, 원어스, 트레저, 바비 등. 이번 회차부터 에린, 예미가 필진에 합류했다.
"24"는 Part 1과 2로 나누어 발표한 정세운의 첫 정규 앨범으로, 스물넷 정세운의 작품임과 동시에 서로에게 24시간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주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다분히 순수하고 낙천적인 메시지는 일부러 힘을 주지 않아도듣는 이에게 충분한 에너지를 준다. Part 1을 듣는 이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너의 등불'로, Part 2는 어둠 속에서도 위로와지지를 보내는 '나의 등불'로 요약했는데, 이는 뮤직비디오의 미장센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주광에 촬영된 'Say yes'와 노을과 야경 위주로 톤 다운된 화면에 노이즈까지 들어간 'In the Dark'의 뮤직비디오는 정세운의명과 암을 그대로 보여준다. 비주얼과 마찬가지로 음악 또한 Part 1과 Part 2가 각각 낮과 밤의 여러 가지 이미지를 표현한다. Part 1은 해가 가장 높은 곳에 떠 있는 힘찬 정오를 연상케 하는 'Say Yes'로 시작해 모든 트랙이 청자와의 적극적인 소통을 목표로 하는 듯 진취적인 가사와 사운드로 가득하다. 불면의 밤을 지난 뒤 맞는 아침을 노래한 '새벽별'이 끝나고이어지는 Part 2 또한 여러 시간대의 밤을 묘사한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나른한 오후가 연상되는 ':m (MIND)'을 지나 본격적으로 밤이 시작되는 'In the Dark'와 새벽을 지나는 'Fine', 자정 즈음 심야 라디오 방송 같은 'DoDoDo'와 석양을 배경으로 하는 청춘의 연애담 '숨은 그림 찾기'까지 듣고 나면 밤새워 쓴 러브레터 같은 'Be a fool'을 마지막으로 앨범이 끝난다. 마치 AM과 PM으로 구분된 듯한 앨범을 듣고 나면 스물넷 정세운과 24시간 함께 지내본 듯한 친밀감까지 느낄 수있다.
정세운은 자신만의 속도로 나아가는 모습을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채운 앨범을 통해 보여주며 청자들이 정세운이라는 사람에게 가까워지도록 한다. “24” 역시 정세운의 감성에 초점을 맞추어 온전히 그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이번 앨범은 과거 그가 노래했던 ‘20 Something’을 떠올리게 하는데, ‘20 Something’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있기에 불안한 감정을 담담하게 불렀다면, “24”에 이르러서는 스물넷 자신의 감정들을 더욱더 다채롭고 편안하게 표현한다. 또한, 이전 발매작들에서 보여준 모습들을 “24”에서는 Part 1과 Part 2로 각각 여름과 겨울의 계절감에 따라 분류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서정성을 담아내고 있다. “24”의 서정성은 밴드 사운드와 가사에 기인하고 있는데, 적극적으로 사용한 밴드 사운드가 바람과 같이 흐름에 맡기고자 하는 태도의 가사가 어우러지며 두 파트 간의 연결이 이루어진다. 파트별로 보자면 Part 1에서는 그의 경쾌한 리듬과 낭만을, Part 2에서는 편안하고 담담한 감성을 담아내고 있다. Part 1의 ‘Say yes’, ‘Don’t know’, ‘Beeeee’와 같은 트랙은 경쾌함과 리드미컬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뮤직비디오 역시 이에 맞추어 다양한 색감을 사용하여 표현한다. Part 1 마지막 트랙 ‘새벽별’은 감성적인 Part 2로 이어지는 인털루드 역할을 하여두 파트 간의 연결을 이루고 있다. Part 2는 전체적으로 그의 감성을 표현하는 데에 중점을 둔다. ‘:m (Mind)’, ‘In the Dark’, ‘Fine’ 트랙들에서는 그루비한 리듬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Part 1의 경쾌한 리듬과 대비되어 두 파트 간의 차이를 부각시킨다. 이후 ‘DoDoDo’, ‘숨은 그림 찾기’, ‘Be a fool’에서 정세운의 담담함과 차분함이 강조됨으로써 앨범은 마무리된다. “24”는 여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의 정세운의 감성에 초점을 맞추어 그가 가지고 있는 조급하지 않고 차분한 속도를 느낄 수 있도록 하여 청자에게 쉼의 순간을 선사한다.
초반부는 전작 “EARTH AGE”의 타이틀이었던 ‘nanana’를 연상시키다가, 조금씩 무드를 달리하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다음 곡 ‘우당탕’의 테마를 소개하는 인트로 트랙이 귀를 잡아끈다. 폭풍처럼 맹렬히 몰아치던 ‘nanana’에서보다는 다소 느긋하게 힘을 뺀 듯하다는 것이 아마 대다수의 리스너가 ‘우당탕’에 느끼는 첫인상일 것이다. 전작을 생각하면 일견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는 곡 구성이지만, 특유의 잘 벼려진 퍼포먼스에 여유로운 스웨거를 첨가한 뻔뻔할 정도의 애티튜드는 차마 거부하기 어렵다. 그루비한 기타 리프에 몸을 맡기며 신나게 리듬을 타고나면 ‘LOUDER’가 열기를 조금은 서늘하게 가라앉히고, 넘치는 패기로 잽과 펀치를 번갈아 가며 날리는 ‘KO, OK!’가 다시금 흥을 돋운 뒤, ‘PLAYER’로 마구 내달리고 나서 ‘Outro ; ㅁㅊㄴㄷ’로 종지부를 찍는가 싶더니 마치 앵콜 무대처럼 ‘아직 끝난거 아이다’로 남은 흥을 몽땅 털어버리는 앨범 구성이 무척 깔끔하고 준수하다. 마치 잘 짜인 콘서트 세트리스트를 보는 듯한 기분도 드는데, 얄궂게도 시국 탓에 이들이 가진 포텐셜을 관객에게 채 어필할 기회가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팀의 미래가 언뜻 기대되기도 한다. 만듦새 자체에는 흠결이 없으나 한 가지 흠을 굳이 잡자면, ‘Outro; ㅁㅊㄴㄷ’의 일부 랩 벌스에서 들어가지 않았다면 좋았을 혐오 표현이 마음에 걸린다는 정도일까. 멤버가 직접 참여했기에 더더욱 아쉬워지는 부분. 더 나아진 모습을 후속작에서 기대한다.
빅톤이 데뷔 5년 만에 내놓은 정규 1집. 본인들뿐만 아니라 팬들도 몹시 고대했을, 팀의 커리어에 중요한 이정표를 찍는 작업물이다.
열세 트랙으로 가득 채운 음반은 지금의 빅톤이 보여줄 수 있는 열과 성으로 가득하다. ’청량’이라는 키워드로 대표 되는 케이팝 아이돌표 캔디팝부터 어둡고 유혹적인 무드의 EDM까지, 빅톤은 자기 세대 케이팝의 중간값과 같은 음악을 선보여왔다. 획기적인 사운드를 수입하거나 트렌드를 선도하기보다는 ‘현시대의 케이팝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보여주는 듯한 곡들이 이들 디스코그래피의 주류를 이뤘다. 누군가는 도전정신이 부족한 기획이라 할 법도 하지만, 이런 팀이야말로 가요 씬의 허리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빅톤에게서는 동 세대와 비교했을 때 유독 —이들의 올 타임 롤모델이기도 한— 하이라이트처럼 중소 신화를 이뤄낸 2.5세대 아이돌들의 정취가 강하게 느껴진다. 그 시절 아이돌 씬에 깊은 추억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외면하기 어려운 매력일 것이다.
타이틀곡 ‘What I Said’는 이제껏 빅톤이 발표해온 가상의 캐릭터로서 애정을 말하는 가요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작년부터 차근차근 1위를 거머쥐며 기세를 몰고 있는 바, 가사에서 이들의 야심이 가득 느껴지는 스웨거 송이다. 루프로 돌아가는 라틴 계열의 튠은 잠시 2000년대 초반 불독맨션이 시도한 한국 가요와 라틴 음악의 접목을 떠올리게도 한다. 808 드럼머신으로 달려가는 트레시요 리듬에 흥겹게 들러붙는다.
앨범에는 타이틀 외에도 알앤비 발라드 등 다양한 장르를 담았다. 야심차게 준비한 만큼 큰 사랑을 받기 바란다.
빅톤의 이미지는 데뷔 이래 줄곧 ‘청량’한 소년상에 느슨하게 발을 걸치고 있었으나, 노랫말과 그를 소화하는 멤버들은 되레 고전적인 남성상에 더 가까운 모습을 내비치고는 했다. 이후 그룹에 내적/외적 변화를 야기한 <프로듀스 X 101>를 기점으로 빅톤은 이질감이 종종 느껴지던 기존의 콘셉트에도 변화를 주고자 한 것으로 보이며, 데뷔 6년 차가 되어서야 내놓는 첫 정규앨범 “Voice : The future Is now”는 그 의지가 가장 강하게 엿보이는 작품이다. 타이틀곡 ‘What I Said’는 멜로디를 중심으로 곡이 전개되던 기존의 타이틀곡들과 달리 리듬이 강조된 라틴 트랩 트랙 위 반복적인 어구(“What I Said”, “Boom”)로 강한 임팩트를 준다. 전에 없이 힘이 바짝 들어간 도한세의 랩에서는 독기마저 감지된다. 짓이기는 식의 랩이 이전까지는 유독 튀는 인상을 주고는 했는데, 바뀐 그룹의 지향성 아래 적재적소에 활용되고 있는 듯하다. 그룹의 야심은 멤버들의 솔로곡 4곡을 포함해 13곡에 달하는 큰 볼륨의 앨범에 걸쳐서 나타난다. ‘Chess’, ‘Unpredictable’, ‘Flip a Coin’과 같은 트랙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전반적으로 통속적인 가요 내음을 풍기던 과거를 벗어나 동 세대 케이팝의 표준을 좇고자 하는 결의가 두드러진다. 아쉬운 점은 대다수의 곡이 현존하는 어떤 보이그룹에 피칭되어도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통상의 보이그룹이 시도할 만한 스타일만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일부 곡들은 키를 바꿔여느 걸그룹이 불러도 위화감이 없게 들린다. 기존의 멜로딕함이 슬며시 배어있는 ‘Circle’, ‘Up To You’가 그룹의 명맥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 역시 차별점으로 거론하기는 어려운 듯하다. 여러모로 ‘표준’과 ‘평균’의 차이를 곱씹어보게 된다.
약간의 신곡과 싱글컷의 모음, “THE FIRST STEP : TREASURE EFFECT”는 YG 레이블 바깥의 순진한 이미지를 끌고 온다. 타이틀곡 'MY TREASURE'는 여타 남자 아이돌그룹이 선보일 법한 화사하고 청량한 응원으로 소속 레이블의 이미지와 대비를 이루며 의외성이 도드라지게 한다. 선공개한 싱글을 순서대로 수록한 데서 보이는 무신경함은 못미덥지만, 파워풀한 타이틀과 화사하거나 칠한 무드의 커플링곡의 교차로 생기는 낙차는 그들이 데뷔할 때부터 짙게 드리워진 레이블의 개성을 다소간 희석한다. 지난 활동곡은 싱글컷으로 들을 때보다 상대적으로 거부감 없이 다가오는데, 풀 파워로 증명하고자 했던 남다름 혹은 강렬함이 'MY TREASURE'의 해사함 뒤에 숨어 그 강도가 정제된 것처럼 보여서다. YG 보이밴드 3.0 모델로서 내딛는 그들의 걸음이 이전과는 다를 것이라는 뚜렷한 구분선에 의의를 두며, 다음 “STEP”에서는 동시대 그룹과의 차별점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타이틀곡 'MY TREASURE'는 YG에서 나왔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만큼 정석적인 캔디 팝이다. 심지어 랩마저 이제는 YG 밖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톤으로 매만져져 있어 사전 정보가 없다면 YG 소속임을 도저히 알 수 없게 연출했다. 강렬했던 레이블의 색깔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략으로는 유효해 보이지만, '탈 YG' 이상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해야 한다는 과제가 추가된다는 점에서는 상당한 모험으로 보인다. 정규 1집에 수록된 3곡의 신곡은 과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기에는 다른 그룹과 차별화되는 뚜렷한 개성이나 방향성을 느끼기 힘들다. 기계적으로 수록된 이전 싱글이 정규 앨범 단위에서 유기성을 보이지 못한다는 점에서 더욱더 그렇다. 'BOY'와 '사랑해', '음'으로 보여준 강렬함과 달리 'MY TREASURE'는 갑작스러운 노선 변화를 꾀하는데, 정규 앨범의 타이틀곡은 싱글 타이틀보다 커플링 곡들과 궤를 맞추고있다. 방예담 등 프런트 멤버가 부각되는 오디오에 비해 비주얼 퍼포먼스는 더더욱 의문스럽다. 빅뱅의 태양이나 위너의 이승훈 같은 눈에 띄는 키 플레이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전성기 엑소나 세븐틴처럼 다인원 그룹만이 할 수 있는 잘정돈된 군무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12명으로서의 매력은 무대보다 유튜브 자체 콘텐츠에서 더 잘 느껴지는 듯하다.
원어스 등 RBW에 소속된 팀들의 음악은 대체로 ‘가요적’ 색채와 함께 약간의 통속성을 띤다는 것이 나름의 특징이자 변별점이라고 생각하는데, 타이틀 ‘반박불가’ 역시 그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지금껏 타이틀곡에서 이렇게까지 다듬어지지 않은 까슬한 에너지를 분출하는 경우는 없었던 듯한데, 그럼에도 ‘과잉’ 내지는 ‘진성 케이팝’으로 표현되는 팀의 기조는 꾸준히 가져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사가 멤버들의 또래보다는 다소 윗세대에 의해 발화된 것으로 보이는 점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하나, 이 역시 어느 정도는 의도된 부분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전반적으로 전작 “LIVED”와 크게 다르지 않은 구성을 보이는데, 어쩌면 일종의 ‘확장판’으로 볼 수도 있을 법한 부분. 작곡에 참여한 레이븐의 취향이 백분 반영된 듯한 느긋한 무드의 트랙(‘식은 음식’), 과할 정도로 처연하고 비장한 트랙(‘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우리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발키리’, ‘태양이 떨어진다’, ‘COME BACK HOME’ 등과 같은 ‘진성 케이팝’의 계보를 계승하는 듯한 트랙(‘Lion Heart’) 등 팀의 디스코그래피에서 일종의 필수요소로 자리 잡은 듯한 곡들이 다수 포진한 가운데, (선공개곡이기도 했던) ‘뿌셔’나 ‘What You Doing?’처럼 약간의 새로운 시도로 보이는 곡들이 군데군데 포인트를 더하고 있다. 거기에 앨범을 소개하며 몰입감을 더하는 인트로 트랙 ‘Intro: Devil is in the detail’과 깔끔한 뒷맛의 아우트로 트랙 ‘Outro: Connect with US’까지. 여러모로 무척이나 ‘원어스다운’ 앨범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바비의 랩의 가장 큰 특징은 광폭하지만 좀처럼 위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유의 낙천성으로 압도적인 공격력을 공격적이지 않게 귀결시키는 래핑은 부대낌 없이 타격감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고, 이는 힙합 씬과 아이돌 씬을 막론하고 바비만의 분명한 차별점으로 자리한다.
지금껏 내놓은 곡 중 가장 흉포하다 할 수 있을 ‘야 우냐’ 역시 유치함을 한껏 과장해 보인 제목의 서체가 대변하듯 유희적이고 우스꽝스러운 태도를 견지한다. <쇼미더머니> 시리즈의 기폭제 역할을 한 래퍼가 “돈만 쳐다”보는 세상을 밟아서고 길길이 날뛰는 1번 트랙 ‘야 우냐’를 넘어서면, 별다른 압제의 의도도, 공연한 치레도 없는 우직한 자기과시가 폭포수처럼 떨어진다. ‘RocKstaR’, ‘NO TIME’, ‘BrEAk It DoWn’, ‘새벽에 (In THE DaRk)’ 등 스킷이 터놓은 서사의 경로를 따라 퍼부어지는 오디오 펀치의 쾌감이 상당하다. 물론 온통 “강북 대표 Playboy”의 고루한 남성상에 몰두하는 서사는 따분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SKIT 3’ 이전까지는 말이다.
‘SKIT 3’에서는 유튜버 오마르가 흐름을 뚝 끊고 등장해 (“오~마르~의 삶~”) 직전까지 앨범을 주름잡던 “강북 대표 Playboy”의 행실을 신랄하게 꼬집는다. (바비는 평소 즐겨 보던 유튜버인 오마르를 직접 섭외해 앨범 스토리를 설명한 뒤 실제로 이런 사람이 있다면 어떤 충고를 할 것인지를 물어 ‘SKIT 3’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강북 대표 Playboy”는 “무슨 소릴 하는 거야”라고 볼멘소리를 내지만 결국 이어지는 수록곡들에서 예견된 말로를 걷는다. ‘우아해 (GOrGeOuS)’와 ‘LiAr’는 오마르가 진단한 구태의연한 남성상을 그대로 재현하고, 엉망진창의 파티 ‘주옥 (HeartBROKEN PlaYBoY)’은 하나의 우스운 풍자극을 보고 있는 느낌마저 안겨준다.
“주옥같이 Party”를 즐긴 뒤 ‘SKIT 4’에서 바비는 홀로 집에 돌아와 사색에 잠긴다. ‘SKIT 4’ 뒤의 파트는 비루한 결말을 맞은 플레이보이의 서사를 보편적인 청춘의 서사로 뻗어내려 한다. 앨범에서는 유일하게 플레이보이의 ‘수작질’과 관련된 일말의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 ‘RaiNinG’과 ‘내려놔’는 20대를 지나는 여느 젊은이의 내러티브를 꺼내 보이고, 마지막 곡 ‘DeViL’은 “내 방패는 카시오 내 전투화는 나이키”를 외치며 악마로 상정된 부정적인 감정들을 뚫고 거침없이 전진해나간다. 일렉 기타와 둔탁한 드럼 반주 위에 굳건히 선 그의 모습은 비로소 일전에 노래하던 ‘RocKstaR’에 등극한듯 보인다. “광폭하지만 위압적이지 않은” 바비의 치명타는 이 곡에서 가장 형형하게 위용을 뽐낸다.
“LUCKY MAN”의 1인칭 주인공으로 보이던 바비는 ‘SKIT 3’를 기점으로 돌연 전지적 작가로서 정체를 드러내며 앨범의 프레임을 재편한다. 통상 플레이어와 노래의 화자가 등치되는 힙합의 문법과 콘셉트에 맞춰 얼터-이고를 내세우는 아이돌의 작법이 교차하는 가운데, “LUCKY MAN”의 어디까지가 그의 본체이고 어디까지가 그의 캐릭터인지 경계는 흐릿해진다. 애초에 그를 따져 묻는 것이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겠다. 결국 핵심은 인물상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연출가적 면모와 그에 걸맞은 입체적인 래핑에 있다. 혹자는 “강북 대표 Playboy”의 페르소나가 동원된 것 자체에서 YG의 유구한 남성상을 떠올릴 테고, 그는 분명 유효한 감상이나, 간만에 YG 보이그룹에서 흥미로운 텍스트가 나왔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앨범 크레딧이 거의 YG 외부 프로듀서진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과연 우연일까.
기승전결 뚜렷한 연극이다. ‘강북 대표 Playboy’가, 사랑을 하고, 이별을 겪고,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 ‘강북 대표 Playboy’로 돌아간다. 거대한 이야기의 정글이 된 아이돌 산업에서 꽤나 보기 드물게 단순하고 명료한 ‘콘셉트 앨범’이다. 각 트랙은 그 자체로도 들을 만하지만 스킷과 묶여 이야기의 화소로 기능하면서 더 빛을 발한다.
타이틀곡 ‘야 우냐’는 일종의 프롤로그다. ‘강북 대표 Playboy’는 자동차 소리와 함께 요란하게 등장해 물질만능주의자를 ‘가축’으로 조롱하고 ‘여친들 마음’을 전리품 삼아 남성성을 한껏 과시한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SKIT 1’ 이후 뱅어 성격의 곡들이 이어지다가, ‘SKIT 2’부터 ‘강북 대표 Playboy’가 사랑에 빠지며 곡의 멜로디와 코드 진행이 뚜렷해진다.
이야기는 ‘SKIT 3 (feat. 오마르)’부터 본격적으로 재밌어진다. 많은 경우 솔로 아티스트는, 특히 힙합이라는 장르는 택했을 때는 더욱, 곡의 화자와 동일 인물로 간주된다. 그러나 ‘강북 대표 Playboy’와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인 오마르가 등장하고, “LUCKY MAN” 속 ‘강북 대표 Playboy’와 앨범 밖 바비 사이 틈을 벌린다. 그리고 그 틈이 “LUCKY MAN”을 연극으로 만든다.
이별 후 ‘강북 대표 Playboy’의 요동치는 감정선을 따라, 음악도 힙합에서 가스펠과 하드록까지 지나간다. ‘DeViL’의 리얼 드럼과 기타에 기반한 사운드는 앞서 록이 없던 ‘RocKstaR’의 증거가 되고, 이는 이야기의 회귀와 함께 앨범을 처음으로 돌려 다시 듣게 만든다.
“LUCKY MAN”은 근 몇 년간 YG 엔터테인먼트가 끌어온 지루함을 떨쳐 냈다. 스킷이 큰 역할을 했지만 노래와 이렇게 엮어 내는 것 또한 프로덕션 능력이다. 한 사람의 재능이 레이블의 변곡점이 될지는 미지수지만 적어도 듣는 즐거움을 살렸다고는 기억될 수 있겠다.
알립니다. <아이돌로지>는 월 3회 아이돌팝 신보 전작을 리뷰하던 1st Listen 체제를 2021년 부로 월 1회 주목할 만한 아이돌팝 신보를 꼽아 싱글과 앨범으로 나누어 리뷰하는 Monthly 체제로 개편합니다. 이에 따라 1st Listen 체제 하에 있었던 Pick! 제도는 사라지며, Discovery! 제도는 계속 유지될 예정입니다.
아이돌로지에 많은 관심 가져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2021년 1월 아이돌팝 관련 발매작 중 주목할 만한 싱글에 대한 아이돌로지 필진 단평. 홍은기, MCND, 트레저, 유빈, 에픽하이, 크래비티, 드림캐쳐, 아이유, 달수빈의 싱글을 다룬다. 이번 회차부터 에린, 예미가 필진에 합류했다.
태민을 위시한, 남자 솔로 퍼포머의 드문 성공사례를 따르기보다는 본연의 매력을 살리는 쪽을 택했다. 무용을 통해 다져온 실력은 보깅 등 장르 색이 분명한 퍼포먼스를 수행할 때 특히 빛난다. 보컬 또한 가장 안정적으로 음색을 들려줄 수 있는 음역안에서 흐르는 가운데 팔세토로 포인트를 준다. 출중한 수행력을 앞세워 노래와 무대를 압도하려 하기보다는 충분히 조화되기 위해 신경 쓴 느낌이 역력한데, 댄서와의 호흡이나 리듬감을 충분히 살린 보컬에서 그런 섬세함이 느껴진다. 청하 등의 걸출한 솔로 퍼포머들이 떠오른다.
노래는 산뜻하다. 보컬과 연기의 밀도를 꾸준히 올린 결과, 꽤 근사한 팝을 완성했다. 반면, 의상과 안무는 산뜻함과 사뭇 동떨어져 있다. 크롭 재킷, 시스루 블라우스 등 제법 노출이 있는 의상에 몸 선을 강조하는 안무까지 음악과 언밸런스를 이룬다. 청순과 섹시를 퐁당퐁당 오가더니 이번엔 동시에 수행해 오묘한 이미지를 구현했다. 가사와 뮤직비디오도 따로 놓고 보면 무난하게 완결성을 갖췄으나 합치면 다소 난해하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아이러니라 부르기엔 대립하지 않는다. 통일감과 유기성이 절대적 미덕은 아니나, 개연성이 부족해 몰입감이 떨어진다. 퍼포머의 표현력만으로 전부 설득하려 들기보다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나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당탕’은 제목이 지닌 첫인상과 ‘미쳐 뛰어놀아보자’는 가사의 내용에 비해 끝까지 듣고 나면 꽤 차분하게 정돈된 인상의 결과물이다. 읊조리는 듯한 후렴이 심플한 기타 리프와 비트와 합쳐져 묘한 중독성을 만들어내는데, 굳이 귀를 때리는 음향효과나 숨이 가쁠 듯한 빠른 비트가 아니더라도 듣는이를 흥겹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진다.
5인조에 맞춰 꼭 필요한 동작만으로 구성한 듯한 간결한 안무마저도 이러한 스타일에 절묘하게 어울리는데, 자칫 방만해져 버릴법한 지점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으며 과잉과 절제 사이의 줄타기를 하는 듯한 모습은 MCND가 줄곧 고수해온 팀의 고유한 매력이기도 하다. 폭발할 듯한 에너지로 질주하듯 무대를 종횡무진 장악하는 케이팝 보이그룹들은 이미 많지만, MCND는 그 사이에서 같이 뛰어노는 척하면서도 다른 볼일이 생각났다는 듯 여유를 부리며 자신들만의 흥을 즐기는, ‘샛길의 미학’을 보여준다.
‘미치게 뛰어놀자’는 말이 누군가에겐 독주를 진탕 마셔대고 클럽에서 밤새 격렬하게 춤을 추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에겐 친구들과 가볍게 치맥 후 노래방에서 서너 시간 신나게 뛰어놀고 나와 헤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당신이 만약 후자에 속하는 케이팝 팬이라면, ‘우당탕’을 들으며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MY TREASURE’는 브라스와 스트링이 강조된 사운드와 멜로디 속에 보컬 멤버들의 매력이 두드러지는, 특히 곡 전체를 리드해나가는 메인보컬 방예담의 음색이 백분 발휘되는 곡이다. ‘겨울 끝에 봄이 와’, ‘안되면 어때 다시 시작해’ 같은 다소 상투적인 가사조차도 직관적으로 시각화한 듯, 화려한 영상효과가 돋보이는 뮤직비디오와 시너지를 일으키며 팬데믹 시대의 혹독한 겨울을 지나는 이들을 위로해주는 청량하면서도 따뜻한 아이돌팝으로 완성된다.
데뷔부터 지금까지 트레저는 다양하고 폭넓은 색깔의 곡들을 선보이고 있으며 ‘MY TREASURE’는 강한 비트 위로 래퍼 라인이 두드러져 보였던 ‘음’과 대비되는 곡이기도 하다. 곡마다 돌아가며 다른 장점을 부각시킬 수 있다는 것은 다인원 그룹으로서 트레저가 지닌 장점이며, ‘YG 소속 보이그룹이라면 이런 음악을 하겠지’ 하며 막연히 갖고 있던 선입견을 매번 조금씩 깨뜨리면서 천천히 자신들만의 가능성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의도적으로 '비싼' 티를 비껴가며 노골적으로 곡을 치장하는 아르페지오 신스 사이로 매캐한 보컬이 퍼진다. 오래 묵은 고약한 향수 냄새를 맡는 듯한 이 곡이 부담스럽지 않고 유쾌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원더걸스의 복고를 너끈히 떠받쳐온 유빈 특유의 능청맞은 청승 덕이겠다. '숙녀'로 호흡을 맞췄던 Dr.JO를 다시금 호출했다는 데에서 유빈이 솔로 커리어의 방향성을 확고히하고 있음을 읽게 된다. 온갖 향수 광고가 뒤범벅된 듯한 뮤직비디오는 화룡점정과도 같다. 동 세대 케이팝에서 유빈만큼 "복고여전사"라는 (그 이름마저 복고적인) 칭호가 걸맞은 아티스트는 없을 것이다.
‘Rosario’의 트랩 프로덕션에서 ‘神메뉴’, ‘영웅’ 등 ‘마라맛’ 아이돌 팝이 떠올랐다. 여기서 해외 시장에서의 에픽하이가 ‘케이팝’ 카테고리로 묶인다는 사실이 생각난다면 과언일까. 팬덤 공동체를 포괄하는 창작 방식을 기반으로 한 활동 방향, 그리고 아이돌 팝의 지장 하에 있는 여러 장르를 자기 식으로 다뤄 온 커리어는 ‘케이팝’으로 셀링되기를 택한 이들의 행보에 설득력을 부여했다. ‘Rosario’에서 이들은 동시대의 프로덕션을 훌륭히 소화하며, 이들이 걸어온 길 위에 있는 후배 아티스트와 함께 “밟기만 하면 다 길이 됐네”를 외쳐 틱톡과 스포티파이 트렌딩 차트에 띄웠다. 이는 현 시대 케이팝 부흥 속 완벽한 자기증명이자, 오랜 팬덤에게 꾸준히 놀라움을 전하는 아이돌적인 미덕을 실천한 예시일 것이다.
분명 어디선가 봤음직 한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어디서도 본 적 없었던 미묘한 ‘한 끗’을 적절히 잡아낸 기획력에 우선 박수를 보낸다. 전작 ‘Break All The Rules’와 ‘Flame’에서의, 서슬이 퍼럴 정도로 한껏 각과 날이 서 있던 (시쳇말로 ‘가오’라고도 표현하는) 부분을 조금 덜어내고 자유분방한 에너지를 더했다. 이런 식의 다소 레이드백(layed-back)된 무드의 힙합 장르는 (보컬/랩과 댄스 양쪽에서) 퍼포먼스가 다소 산만하거나 지저분해질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팀 특유의 정제-절제미를 유지하는 한에서 균형점을 잘 조절한 덕에 전체적으로 만듦새가 무척이나 깔끔하다. 일견 자유롭게 ‘노는’ 듯하지만, 일종의 질서와 규율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안정감이 느껴진달까. 완전히 새롭지는 않지만, 식상함을 절묘하게 잘 비껴간 매우 신선한 결과물.
'Vroom Vroom Vroom'에 이어지는 'Skrt'는 레이싱카의 타이어 마찰음이나 농구 코트에 울려 퍼지는 호각 소리를 연상케 한다. 음악이 가진 진한 힙합 무드에 비해 일부 보컬의 그루브감이 약한 것이 신경 쓰이지만, 다이내믹을 죽일 정도는 아니다. 가장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드물게 잘 짜여진 댄스 퍼포먼스인데, 데뷔곡 때도 느꼈던 잘 정돈된 포메이션의 변화가 'My Turn'에서 그 매력을 극대화하고 있다. 쉴 새 없이 변하면서 여러 멤버를 충분히 돋보이게 해주는 영리한 퍼포먼스를 구사하는데, 이전에 이것을 가장 잘 구사했던, 동수의 그룹이었던 소녀시대가 연상된다.
드림캐쳐가 처음에 들려주었던 록 혹은 메탈에서 확실히 멀어졌다. “Dystopia” 시리즈에 들어선 이후 적극적으로 장르 확장을 꾀하고 있다. 전작 ‘BOCA’는 뭄바톤 등의 장르에 주로 사용되는 트레시요 리듬을 큰 틀로 하되 킥을 빼곡히 넣어 메탈의 뉘앙스를 살렸는데, ‘Odd Eye’에는 그마저도 없다. 프리-코러스에서 박자를 쪼개기는 하지만 메탈의 스타일이라기보다 EDM 식 빌드업에 가깝다. 그러나 디스토션을 강하게 건 기타와 그를 뚫고 쨍하게 쏘아붙이는 보컬은 여전히 드림캐쳐만의 색을 또렷이 드러낸다. 자기 복제와 변절 사이에서 표상으로 삼은 장르를 놀랍도록 영리하게 분해하고 취사해 길을 찾았다. 흥미로운 지점은 음악의 장르 확장이 안무의 확장으로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정박마다 찍는 킥이 빠지며 왁킹, 힙합 등 스트리트 계열에서 차용한 동작들이 전보다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들의 길이 진정한 유토피아에 닿지는 못했을지라도 더 넓은 세상과 닿았음은 분명하다.
정규 앨범에 앞서 선공개된 곡. 지난 EP “Love Poem”과 이어지는 또 다른 '사랑시'다. 과격한 신스나 보컬 찹(Vocal chop)으로 채운 드롭은 케이팝의 맹렬한 넘버들 사이에 넣어야 할 것 같은 인상인 데 반해, 전체적인 느낌은 생각보다 미니멀 해서 낯선 인상을 준다. 이 독특한 느낌을 봉합하는 요소는 역시 아이유의 보컬. 연신 가성으로 가볍게 속삭이는 가성이 선량하고 따뜻하다. 아이유는 지난 작품부터 유독 '위로'라는 주제를 깊이 다루고 있는데, 그것이 누구에게나 통할 범용적 "좋은 말"은 아님에 주목이 간다. 보편에 초점을 맞출 때 자연히 소외되는 사람들에 화자가 더 마음을 쓴다는 의미도 되겠다. 줄마다 촘촘하게 'ㅣ'로 모운을 맞춘 가사를 듣다 보면 그 단어의 선택이 얼마나 예민한지, 위로를 건네고자 하는 사람의 어렵고도 간절한 의도가 느껴진다. 값싼 위로의 해악을 경계하며 대중예술 창작자로 훨씬 성장해나가고 있는 아이유가 들리는, 다가오는 정규 앨범이 몹시 기대 되는 싱글.
가시마냥 뾰쪽하고 공격적인 섹스 어필로 무장했던 현아가 피네이션 합류 후 내놓은 'Flower Shower'는 날 섦의 시기는 부드럽고 유연하게 넘어갔다는 일종의 선언처럼 들렸다. 이 선언의 연장선상인 'I'm Not Cool'은 현아 스타일의 성숙으로 기능한다. 타이틀곡은 사정없이 내리꽂는 신스와 격렬한 퍼포먼스 등으로 현아의 존재감을 번쩍이게 하는데, 쿨하지 않음을 쿨하게 드러낸 이중성이 매력적이다. 메시지의 내용과 대상을 투명하게 보여낸 브릿지가 다소 투박하게 들리지만, 솔직함을 테마로 호쾌하게 달리는 곡의 흐름을 해치지는 않을 정도다. 그의 다양한 면면을 조명하는 수록곡 중 'Show Window', 'Party, Feel, Love'에서의 푸른 빛 이면에도 눈길이 간다. 조금 낮은 채도의 뒷모습을 진득하게 보여주는 트랙이 더 있길 바라는 마음은 후속작에 넘기며, 앞으로 더 능숙하게 자신을 드러낼 현아를 기대하기에 충분한 EP였다.
기억 속에서 조금씩 잊힌 걸그룹 출신 아티스트에게 인생곡과 무대를 선사하는 MBN <미쓰백(Miss Back)>에서 마지막으로 솔로곡을 선물 받은 달수빈의 'Sign'. 아티스트의 개성과 트렌드라는 두 축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편이었던 <미쓰백>의 발표곡 중 이 두 축이 깔끔하게 잘 맞아떨어진 곡이었다. '사이-Sign-쌓인'으로 포개어지는 라임은 숨결을 강조해 애타는 듯한 느낌으로 치환되고 긴 팔다리를 살린 안무와 의상은 실연자의 매력과 수행력을 한껏 돋보이게 한다. 그룹 활동과 그 이후 솔로 활동을 통해 꾸준히 보여줘 온 그의 음악적 역량이 마치 미디어의 수혜로 '재발견'된 것만 같은 현실이 얄밉지만, 그를 포함해 <미쓰백>에 등장한 아티스트의 행보에 따스한 스포트라이트가 드리워진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데뷔 10년 차를 맞은 그가 시의적절하게만난 인생곡을 기점으로 자신만의 다양한 컬러를 선보이길 기대해본다.
다수의 콜라보레이션 이력이 증빙하듯 어떤 아티스트와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긍정적인 의미로) 통속적인 보컬 면에서나, 여러 스타일의 댄서를 규합하는 퍼포먼스 면에서나, 청하는 융통, 혹은 중용이 돋보이는 아티스트였다. 이는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케이팝에서 주요한 미덕이기에, 청하가 빠르게 성공적인 솔로 아티스트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동인이 되어주기도 했을 것이다.
DJ 소울스케이프가 힘주어 쓴 앨범 리뷰가 드러내듯 정규 1집 “Querencia”의 지향점은 분명하다. 21곡의 압도적인 볼륨을 자랑하는 앨범은 청하의 다능함을 펼쳐놓으며 독보적인 “케이팝 디바”로서 확인 도장을 찍고자 한다. 각 사이드를 힘차게 견인하는 인트로를 위시해 4개 사이드로 분철된 앨범은 “케이팝”의 초월적 특성을 “디바”의 위용으로 풀어나간다. 동 세대 팝 디바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신흥 디바로서의 야망이 감지되는 타이틀곡 ‘Bicycle’을 시작으로, 보깅 퍼포먼스로 퍼포머 청하의 입지를 공고히 했던 ‘Stay Tonight’, 장렬한 투우의 메타포 아래 댄서들과 벌인 난장 ‘Play’를 지나 마음의 안식처 ‘Querencia’로 향하는 구성은 흡사 월드 투어 콘서트의 잘 짜인 셋리스트를 보는 듯하다. 수민-슬롬, 콜드, 검정치마, 백예린-구름, R3HAB, Guaynaa까지 다종다양의 아티스트와 호흡을 맞춘 청하는 한국, 유럽, 남미에 이르는 다양한 대륙 사이 중립적인 영역을 점한다. 자칫 아티스트가 잠식되기 쉬울 만큼 뚜렷한 스타일의 작곡가들, 그리고 장르의 곡들까지 특유의 담백한 보컬로 위화감 없이 소화해내는 데에서 청하가 지닌 융통의 미덕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앨범에 5점 만점을 부여한 〈NME〉의 리뷰에서는 “Querencia”를 대륙을 넘나드는 청하의 여정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이러한 융통과 중용으로 미루어봤을 때, 청하는 세계 각지를 헌팅하는 여행자라기보다 온 대륙을 품는 바다에 가깝다고 생각해본다. 세계적으로 다양성의 가치가 강조되고, 케이팝, 그리고 여성 아티스트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는 만큼, 넓은 바다와 같은 수용성을 지닌 “케이팝 디바” 청하가 지닌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 2019년 SXSW에 참석하고 Rich Brian, Christopher와 협업한 데 이어 정규앨범 발매를 앞두고 88 Rising과 협약을 체결한 청하의 행보는 세계가 그를 케이팝에서 부상한 현시대의 새로운 팝 스타로 주목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글로벌 시장을 향한 본격 출사표인 “Querencia”에는 첫 포트폴리오 작성에 으레 범하기 쉬운 실수처럼 보이는 지점도 존재한다. 과중한 무게감을 지닌 SIDE A와 느린 템포의 곡들의 나열로 다소 지지부진한 인상을 주는 SIDE D에서는 사뭇 부담감이 느껴지고, 지난 앨범 “Flourishing”에 이어 팝 디바의 레퍼런스가 노골적으로 읽히는 구간이 존재해 아쉽다. 그러나 결국 “케이팝 디바”라는 타이틀 그 자체가 많은 부분을 상쇄한다. 케이팝에서는 댄스 디바의 융성기였던 00년대 이후 간만에 떠오른 차별화된 “디바”로서, 팝 시장에서는 시의성 있게 등장한 “케이팝”의 여성 솔로 아티스트로서 청하는 독보적인 지위를 점한다. 물론 이는 당연히 그를 너끈히 떠받치는 수행력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일 테다.
“Querencia”는 "케이팝 디바"로서 청하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는 점에서만큼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지금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나, 앞으로는 거창한 표어 이상의 “청하”라는 이름값을 더 끄집어내도 좋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어본다.
시작하자마자 다소 과할 정도로 묵직하게 몰아치는(‘Don’t Call Me’) 사운드에서, 문득 이 팀이 고유의 수식어로 내세우곤 하던 ‘컨템포러리’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일말의 클리셰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한, 요만큼의 식상함도 거부하겠다는 듯한, 조금이라도 뻔해질 법한 부분을 기어코 비껴가고야 말겠다는 기세와 고집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여성 화자의 시점에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노랫말을 남성 화자의 입을 빌어 발화하는 지점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는 ‘이 역시 컨템포러리’라고 우길 수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그러나 다소 위압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우려 섞인 지적 역시 동의하는 바다). 불협화음처럼 히스테릭하게 반복되는 “Don’t Call Me”의 포화를 거치고 난 이후의 수록곡들은 대부분이 가볍고 산뜻한 질감을 띠는데, 타이틀곡과 이루는 묘한 불균형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준수한 그 면면을 차마 외면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어딘가 미완으로 끝나버린 것만 같은 마무리감이 못내 아쉽다. 멤버의 코멘트에 의하면 미처 싣지 못한 두 곡이 더 있었다고 하는데, 어떤 곡이었을지 무척 궁금해지는 동시에 향후 발매될 리패키지 앨범을 기대하게 된다. ‘CØDE’와 ‘Kiss Kiss’를 가장 즐겁게 들었다.
10주년에 맞춰 발매된 6집 “The Story Of Light”가 지난 세월의 명과 암, 든 자리와 난 자리를 오롯이 떠안는 데에 전념한 숙제 풀이와도 같은 앨범이었다면, 군백기 이후 발매한 7집 “Don’t Call Me”는 본격적인 새 출발을 위한 땅 고르기처럼 느껴진다.
1번 트랙이자 타이틀곡인 ‘Don’t Call Me’는 그룹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하다. 원래 보아의 곡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Don’t Call Me’는 일견 동방신기 ‘왜’, 엑소 ‘중독’, NCT 127 ‘Cherry Bomb’, 슈퍼엠 ‘One’ 등 근대 SMP의 표준이라 일컬어질 수 있는 곡들의 전철을 밟는 듯 보이나, ‘Lucifer’, ‘Why So Serioius?’와 같은 곡에서 두드러졌던 파열과 격동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으로도 들린다. 돌이켜 보면 이러한 파열과 격동이야말로 “컨템포러리 밴드” 샤이니를 지탱한 요소이기도 하다. 리드미컬한 슬랩 베이스가 곡을 관통하는 ‘산소 같은 너’, 빠드득한 전자음과 산뜻한 보컬이 교묘한 조화를 이루는 ‘Juliette’, 기괴한 패치워크를 도입한 ‘Sherlock’, 화성을 어지러뜨리며 질주하는 ‘Dream Girl’, 폐가 터질 듯한 퍼포먼스를 보여준 ‘Everybody’ 등 ‘청량’함으로 소화되는 곡들조차도 그를 작동시키는 근저에는 일말의 하드코어함이 항상 자리하고 있었다. 힘을 한층 누그러뜨린 후기 작업에서는 예상치 못한 레퍼런스의 수혈로 케이팝 씬에 균열을 내는 가운데 ‘Romance’, ‘Trigger’, ‘Woof Woof’ (4집), ‘Prism’, ‘U Need Me’ (5집), ‘Undercover’, ‘Electric’ (6집) 등의 수록곡으로 엣지(edgy)함을 계속 견지해왔다. 샤이니가 주로 사용해온 사운드 팔레트에서는 벗어나는 808 베이스 주도의 힙합 곡에 이질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들으면 들을수록 ‘Don’t Call Me’는 샤이니의 곡으로 위화감 없이 포섭되는 듯하다. 물론 부쩍 아티스트 간 음악 색채 구분이 모호해진 근래 SM의 맥락을 상기했을 때 처음의 기시감이 가시지는 않지만, 오랜 공백 뒤의 컴백에 뻔한 선택지를 벗어나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자 했다는 멤버들의 결단이 납득되는 결과물이다. 곡을 견인하는 키의 기량과 존재감에서는 샤이니에게 (‘발전’이 아닌) ‘성장’의 여지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감상도 든다. 다만, 본래 여성 화자의 관점에서 쓰였을 노랫말이 남성 화자에 의해 발화될 때 다소 위압적으로 느껴질 소지가 생기지 않는가는 고려해볼 만한 주제겠다.
2번 트랙부터는 샤이니 하면 흔히 떠올릴 ‘청량’으로 급물살을 탄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앨범에 짙게 깔린 여유와 관록이다. 6집에서는 치열한 추도를 수행하는 가운데 차마 놓을 수 없는 (혹은 놓쳐선 안 되는) 긴장의 끈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7집의 수록곡에서는 한층 유해진 태도가 읽힌다. 수록곡에서 날카로운 감각을 뽐내되 타이틀곡은 대개 유려하게 일관했던 커리어 후반기의 행보를 뒤집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Heart Attack’, ‘I Really Want You’, ‘Kiss Kiss’ 등 훵키한 넘버들을 주축으로 뻗어가는 가운데 몽환적인 ‘CØDE’, 레게 리듬의 ‘Body Rhythm’ 등으로 신선한 포인트를 더하는 앨범의 흐름에는 막힘이 없다. ‘네가 남겨둔 말’과 ‘셀 수 없는’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들리는 마지막 곡 ‘빈칸’은 이따금 감당하기 벅찬 느낌도 들었던 전작에 비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샤이니의 앨범 중 현시점에 듣기에 가장 평탄한 앨범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다. 타이틀곡과 수록곡의 극명한 간극은 리패키지 앨범에서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샤이니의 또 다른 진취를 기대했던 청자에게는 아쉬움으로 다가갈 수 있겠으나, 6집에 드리운 중압이 못내 마음에 걸리던 청자라면 반길 만한, 안정적인 리셋이다.
스피카의 메인보컬들이 뭉쳤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기대를 불러일으킨 팀이다. 스피카 시절부터 함께 해온 프로듀싱팀 스윗튠과 작년부터 꾸준하게 다양한 작품을 발표해왔다. 스윗튠은 2000~2010년대 DSP와 B2M(DSP 출신의 길종화 대표가 만든 기획사) 아티스트 다수와 긴밀하게 작업했던 바 있다. 그 시절 케이팝을 사랑한 사람들에게는 몹시 반가울 만남이다. 이번 앨범 "SCANDAL"은 2020년에 발표한 싱글들에 신곡 4곡을 추가한 형태로, 한 장의 음반으로 기획되었다기보다는 그 싱글들의 묶음에 가깝다.
다수의 곡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주제를 꼽자면 훵키한 베이스가 기반이 되는 레트로 무드 팝이라는 점이겠다. 앨범의 타이틀곡인 'INSIDE'에서는 어둡게 눌러놓은, The Weekend의 히트곡 같으면서도 케이팝적인 형태미가 살아있는 모양새로, 또 선행 발매했던 싱글 '99'에서는 #시티팝 이라는 해시태그(실제 장르 구분에는 맞지 않아 해시태그라고 표기한다)가 어울릴 퓨처 훵크 스타일 디스코로 적용되었다. 무난한 버스로 느릿하게 시작하는 'LOVE ME 4 ME'는 후렴에 가면 유키카 같은, 타케우치 마리야의 'Plastic Love' 스타일 #시티팝(역시 장르 아닌 해시태그) 무드의 케이팝으로 변한다.
가창력이 돋보이는 여성 듀오지만, 다비치 같은 기존 강자와 중첩되는 느낌은 거의 없다. 이들이 스피카로 쌓아온 시간이 어디 가지 않고 지금의 음악에 그대로 녹아나는 것이 킴보를 더 특별하게 만드는 포인트다. 'VOODOO' 같은 곡에서는 스피카 시절 스윗튠과 함께 한 '러시안 룰렛'이나 'LONELY'의 마이너-미디움 템포 팝의 무디함, 그리고 흥겨움이 동시에 느껴진다. 시간이 지나며 두 사람이 각자 새로이 개발한 소리의 영역이 들려오는 것도 감상을 더욱더 즐겁게 한다. 당시 걸쭉하고 소울풀한 느낌을 주던 김보형의 보컬은 보다 더 산뜻한 느낌까지 소화할 수 있게 되었고, 시현과 랩 소절을 나눠 불렀던 김보아는 이제 랩 벌스를 혼자 주도하며 자신의 랩으로 노래에 결정적 순간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잘하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 더 잘하는 것을 보는 것은 음악 팬의 입장으로서도 매우 뿌듯하다.
상기했듯 개별 발매되었던 싱글들이 다수인 앨범이라, 곡마다 개별의 서사와 세계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무방하겠다. 각각의 곡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옴니버스처럼 즐기는 것이 적당한 감상법일 듯하다.
스피카 출신 김보아와 김보형이 합쳐 만든 듀오 킴보의 첫 정규 앨범. 두 멤버의 보컬 실력만으로도 듣는 재미가 있다. 이들과 같은 레이블에 소속된 스윗튠의 한재호, 김승수와 두 멤버가 전 곡에 참여하여, 이미 싱글이나 EP로 발매된 수록곡이 마치 이번 앨범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일관된 미감을 가져간다. 현시대 레트로 트렌드를 앨범 전체의 테마로 삼았는데, 이 테마가 스피카의 커리어와 스윗튠의 장기 모두와 부합하는 최선의 선택지였다. 디스코 트랙에 발라드스러운 곡 해석을 선보인 타이틀곡 ‘INSIDE’, 댄스 팝 비트에 파워 보컬과 ‘자고로 인생이란’ 같은 파트로 친숙한 정서를 선보인 ‘CLOUD9’ 등 한국 가요스러운 뉘앙스를 강하게 가져가는 보컬 해석이 그룹 정체성을 형성했다. 리마스터링 후 재수록된 듀오의 데뷔곡 ‘THANK YOU, ANYWAY’, 김보형과 김보아의 솔로곡 ‘REFLECTION’과 ‘BREAK ME’는 굴곡 많았던 둘의 커리어를 음악에 가져오며 오랜 팬에게 용기와 감격을 전했다. 이 앨범을 통해, 김보아와 김보형은 정규 앨범 한 장의 방향성을 완벽하게 끌고 갈 만큼의 보컬 역량을 입증했다. 부디 이 실력자들에게 탄탄한 커리어와 행복한 활동이 기다리기를 빌어본다.
인간의 음성을 빌어 구현된 금관악기 소리("Brrram 빠밤 빠밤 빰빰 빰빠밤빠밤 빰")가 마치 선전포고처럼 힘차게 울리며 포문을 연다('Beautiful Beautiful'). 사운드는 빈 곳 없이 풍성하고 오밀조밀한데, 모든 악기며 요소가 빡빡한 느낌 없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어 피로감 없이 곡을 오롯이 즐길 수 있다. 지난한 시대를 함께 살아내는 모든 이에게 보내는 희망가이되, 위로를 건네는 방식이 촌스럽거나 빤하지 않다는 점도 큰 미덕. 브릿지의 촘촘히 쌓아 올린 아카펠라로부터 곧바로 이어지는 코러스 파트에서는 모종의 ‘벅차오름’을 느끼고 만다. 이토록 벅차고도 올곧은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색색깔의 콘페티처럼 천진하게 반짝이는 사운드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타이틀곡 'Beautiful Beautiful' 이후, 인털루드 'On-You' 이전까지의 앨범 전반부는 일종의 자기소개 파트에 가깝다. 일종의 '셀프 타이틀'이나 다름 없는 앨범 타이틀 "ONF: MY NAME" 그 자체를 적절히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멤버들 본인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직접 자기 자신을 소개하기도 하고('My Name Is'), 보컬이 돋보이는 ON팀과 퍼포먼스를 내세운 OFF팀이라는 두 유닛의 개성을 각자 포근하고 따스한 가스펠 계열의 발라드('온도차')와 갈수록 날 선 광기로 치닫는 댄스곡('비밀')으로 단번에 설명해내기도 한다. 약간의 레트로가 섞인 다크한 신스팝 'The Realist'는 이전 앨범의 '소행성("GO LIVE")'과 '제페토("SPIN OFF")' 등과 궤를 같이하는, 온앤오프가 꾸준히 구사해온 '케이팝의 정수' 그 자체라 할 수 있지 않을지.
산뜻하게 앨범의 흐름과 공기를 환기하는 인털루드 트랙 'On-You'를 지나고난 뒤의 후반부는, 다소 몰아쳤던 전반부에 비하면 가볍고 느긋하다. 피아노와 브라스 사운드가 경쾌한 발걸음을 닮은 템포로 발랄하게 울려 퍼지며 흥을 더하는 '누워서 세계 속으로', 그루비한 미디움 템포의 R&B 'Feedback', 멤버들의 다양한 보이스 컬러와 감성이 돋보이는 발라드 'I.T.I.L.U'까지 이어지며 마침표를 찍는 듯하다가, 다시금 힘찬 브라스 사운드 합창으로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다('Beautiful Beautiful (English Ver.)'). 영어 버전이나 인스트루멘털 트랙 등은 보통 서비스나 보너스로 받아들여지곤 하지만, 본작에서는 왠지 수미쌍관처럼 앞뒤로 붙어 앨범을 비로소 완성하는 느낌이 있다.
CD에만 수록된 'Lights On (2021 Ver.)'을 제외하면 총 10곡인데, 꽉 채운 볼륨에도 부담감 없이 가볍게 일청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강점이 아닐까 싶다. 황현(그리고 모노트리)과 꾸준히 뚝심 있게 쌓아 올린 디스코그래피의 연장선으로 읽히기도 하는데, 전작 "SPIN OFF"가 "아티스트와 프로듀서(혹은 프로듀싱 팀) 간의 끈끈한 음악적 신뢰도와 각각의 역량이 어떠한 경지에 올랐음을 증명하고 있"었다면, 본작은 그 정점을 찍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굳이 흠을 잡아야 한다면, 'My Name Is'가 첫 트랙이었어도 좋았을 것 같다는 점과 일정하게 유지되던 텐션이 'I.T.I.L.U'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다는 점 정도일까.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앨범의 끈끈한 유기성과 탄탄한 완성도에 큰 흠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팀의 커리어에 있어 커다란 터닝포인트로 자리 잡을, 그리고 한 정점으로 두고두고 기억될 한 장.
곡 초반 내레이션에서 “Action”이라고 말하는 순간, ‘Cinema’는 청자들을 가상의 영화 공간으로 데려갈 뿐만 아니라 그 공간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한다. 곡이 영화 속 상대방과 함께해서 설레는 찰나의 순간을 포근하게 표현하는 데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려하게 곡을 전개하거나 강력한 사운드로 강조하기보다는 일정한 리듬의 반복과 함께하는 후렴구 및 편안한 보컬 사용을 통해서 부담 없이 가상의 영화의 순간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한다. 뮤직비디오 역시 레트로적인 공간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포근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멤버들의 퍼포먼스 역시 한층 더 자연스러워 CIX의 매력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솔로 가수, 특히 남자 솔로 아이돌은 여러 명의 멤버로부터 파생되는 콘텐츠와 퍼포먼스의 볼륨을 물리적으로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부족분을 무엇으로 어떻게 채우는가가 가장 큰 관건이 된다. 김우석은 'Sugar'에서 이 부분을 달달한 연애 감정으로 채웠다. 나른하게 늘어지는 R&B 위에 한껏 애교 있게 연출된 보컬은 작년에 나온 백현의 'Candy'와도 비슷한 결이지만, 어딘가 조심스러웠던 백현에 비해 김우석은 좀 더 본격적이고 직설적으로 다가온다. 댄서와의 페어 안무 대신 누군가 앉아야 있어야 할 듯한 빈 의자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퍼포먼스가 특히 인상적인데, 청자에게 다가가는 방식으로 박력 있고 저돌적인 전통적인 남성성 어필보다는 상대가 다가오게 도발하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제목과는 달리, ‘범’의 방향성은 ‘범 내려온다’보다는 ‘대취타’에 가깝다. 트랩 프로덕션과 스웨그 기조의 가사, 그리고 장르 씬을 향해 있는 아이돌 래퍼의 작업물이라는 포지션에서 그렇다.
그루블린 레코즈 창립 이후 라비의 행보는 국내 힙합 씬에 편입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이고, ‘범’의 피쳐링진 선택 역시 그러한 선 위에 있다. 그러나 ‘범’에서 라비는 안무 영상을 주 콘텐츠로 공개하며, 아이돌 활동으로 다져진 퍼포먼스 능력을 주된 어필 포인트로 삼았다. 랩 스킬이나 아티스트로서의 자의식 표출을 통해 씬에서 인정받으려 하던 종전의 여러 시도에 비해 꽤 독특한 방향성으로 보이는데, 씬 내에서 자신이 가진 특징과 강점을 부각하는 동시에 기존 아이돌 활동을 통해 형성된 팬층도 만족시키는, 똑똑한 행보로 보인다.
랩과 프로덕션이 모두 탄탄한 결과물이기에, ‘범’이라는 제목이 괜찮은 결과물에 아류작 이미지를 씌운 것 아닐까 하는 우려도 되었다. 그러나 '범 + 범 내려온다' 퍼포먼스 비디오를 선공개한 것을 보며, 뒤따라가는 전략을 대놓고 내세운 것이 재미있었다. 자신의 위치와 강점, 현 트렌드를 흥미롭게 섞고 비튼 결과물.
홀로 소화하기에는 조금 벅차 보일 정도로 보컬 파트가 쉴 구간이 별로 없는 꽉 찬 구성의 곡임에도 파트마다 보컬의 톤과 창법을 미세하게 변화하며 허전함을 느낄 여지를 주지 않는다. 랩 파트마저 능숙하게 소화하는 모습에서 피처링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자신감마저 느껴지며, 웅장한 드럼 비트와 함께 댄스 브레이크까지 더해져 지금 이 순간 청하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곡 안에 눌러 담은 듯하다.
장대한 정규 앨범의 타이틀곡으로서 어쩌면 다소 무난해 보이는 선택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이 모든 걸 무난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재능의 대단함을 다시 생각해본다. 굳이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건들거리지 않더라도, 청하가 타면 자전거조차도 ‘Swag’가 된다.
청하의 정규 1집 타이틀곡 ‘Bicycle’은 당당한 애티튜드를 지닌 동 세대 팝 디바들의 스타일을 응축해 케이팝의 방식으로 분출해낸다. Rina Sawayama의 ‘XS’, ‘Akasaka Sad’, ‘Snakeskin’, Ariana Grande의 ‘7 Rings’ 등 몇몇 레퍼런스의 다소 상투적인 조합으로 들리기도 하나, 이것이 케이팝의 퍼포먼스로 구현된다는 것 자체가 차별점을 빚어낸다. 주전공인 왁킹을 살려 유려한 팔과 손의 놀림을 부각한 이전까지의 퍼포먼스와 달리 전반적으로 하체에 무게중심을 싣고 있는데, 무대 위에 우뚝 선 청하의 존재감을 견고하게 각인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댄스 브레이크 파트에서는 전성기 시절 이효리의 기개가 떠오르기도 한다. 묵직한 앨범 소개글에서 드러낸 “케이팝 디바”의 지향성에 걸맞은 애티튜드를 지닌 타이틀곡.
‘PARANOIA’는 “어두운 내면”을 호러 콘셉트를 통해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데에 성공적이다. 호러 콘셉트를 표현하는 데에 있어 자칫하면 과욕을 부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적당히 완급조절을 함으로써 부담스럽게 들리지 않도록 한다. 호러 장르에서 떠올릴 수 있는 비명이나, 긴장감을 일으키는 휘파람 소리, “내 맘속에 있는 Monster alone in the dark”에서의 괴수 같은 목소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였으며, 해당 사운드들은 과하지 않은 보컬 운용으로 인해 더욱 강조된다. 이와 같은 완급조절 덕에 호러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릴 수 있도록 하였으며, 곡의 설득력을 높였다.
JTBC 〈슈퍼밴드〉는 그 무엇도 증명할 필요가 없는 밴드들을 탄생시켰다. LUCY는 그 기반으로 아름답고 포근한 선율을 자유롭게 만들고, 아이돌이 아닌 밴드에게는 절대 요구되지 않을 법한 기획을 수용한다. 이제껏 많은 아이돌밴드가 밴드로서의 증명이라고 하는 것에 옭매여 아이돌도 밴드도 온전히 되지 못했기에, 아이돌의 태도와 미학을 스스럼없이 수행하는 LUCY의 행보는 생소하면서도 반갑다.
데뷔곡 ‘개화’부터 꾸준히 계절감을 활용한 만큼 ‘히어로’에도 '눈꽃' 등 계절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번엔 이를 본격적인 주제로 삼기보다 감정을 강화하는 소품으로 사용한다. 몽롱한 발음 사이 “두 손에 빔”은 선명히 나와 후렴을 속도감 있게 이끌고 이내 바이올린 선율 뒤로 사라진다. 베이스가 양감을 풍성하게 채워 LUCY만의 독특한 악기 편성이 더욱 빛을 발하고 노래는 귀에 맺힌다.
‘둠둠타’는 트라이비라는 신인 그룹의 시작을 알리는 데에 적합한 신호탄이다. “둠둠타 둠둠타” 후렴구가 주는 타격감은 트라이비라는 신인 그룹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도록 하며, “네 귓가에 때려 넣어 나 나 나 날”을 외치며 그룹을 각인시키고자 한다. 초반의 인트로와 마지막 후렴을 이어주는 브릿지의 비트는 시원함과 함께 그룹의 쾌활함을 보여준다. 다만, 곡이 전환되는 부분들에서 보컬의 힘이 더해졌다면 보다 곡이 폭발력 있고 호소력이 갖추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뮤직비디오에서 삼각형을 강조하는 이미지들은 신인 그룹으로서의 브랜드를 구축하려는 노력으로, 향후 그룹의 이미지로서 지속해서 사용할지는 지켜보아야겠다.
올 4월에 방영되는 Mnet 〈킹덤〉과 동명인 그룹명으로 한번, 엔소닉의 2016년 발매작 "Excalibur" 이후 오랜만에 등장한 동명의 곡으로 두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를 노림수라고 단언하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수많은 레퍼런스의 레퍼런스로 쌓아 올리는 케이팝에서 모종의 기시감은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케이팝 안무 제작 및 댄서 출신인 고윤영의 프로듀싱으로 탄생한 킹덤은 일곱 멤버가 나라를 다스리는 왕으로 분하는 거대한 세계관을 이끈다. 세계관이 근래 케이팝 마케팅에 필수적이라 해도 이는 아티스트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장치여야 하지 케이팝 그 자체가 되면 곤란하다. 세계관 앞에 나서야 할 플레이어를 두텁게 감싸는 한편, 암청색 영화처럼 어둡고 비장해진 남자 아이돌의 최근작과의 음악적 차별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고 하기 어렵다. 오히려 트랙 리스트 중 분위기를 슬쩍 풀어내는 수록곡 '피카소'와 'X'에서 보컬의 풋풋한 미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네 가지로 구성되었다는 왕의 이야기를 뚝심 있게 전달하면서도 플레이어의 개성을 고르게 녹여낸 차기작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첫 솔로 EP "DUALITY"를 내놓은 몬스타엑스의 래퍼 아이엠. 중저음 톤을 살린 싱잉 랩으로 전 곡을 이끌어 가는데, 시종일관 이모(emo) 정서를 가져가되 타이틀곡 ‘God Damn’에서는 탐미적인 영상 및 연출로 아이돌로서의 면모를 놓치지 않는다. 앨범 전 곡의 작사 작곡을 도맡았지만, 자기를 각인시키겠다는 야심보다는 트렌드에 대한 소화력이 타이틀곡과 앨범 모두에서 돋보였다. 싱잉 랩 스타일에서 준수한 기량을 보여주고, 장르 특유의 어두운 정서와 서정성을 가사로 구현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앨범 첫 트랙으로서 ‘God Damn’은 ‘howlin’‘ 등 이후 수록곡을 더 빛나게 하는 포문 역할을 하는 곡인데, 타이틀곡으로 보기에는 멜로디가 다소 약하고 심심하다는 인상이 들어 아쉽다.
지닌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는 야망을 듣는 이에게는 부담스럽지 않게 조화시켰다. 스스로의 이야기를 담았지만, 밑도 끝도 없는 자기 연민이나 자기혐오, 혹은 내용 없는 분노, 과시로 흐르지 않는다. 넘치는 것 없이 매끈한 트랙을 타고 ‘삶의 주체가 나이길 바라 난’이라는 건강한 메시지를 향해 간다. 그 과정에서 설교를 늘어놓기보다 ‘클리커’라는 아기자기한 소재에 가벼운 말장난과 유쾌한 태도를 더해 교과서적인 메시지의 장벽을 낮춘다. 강한 훅을 먼저 제시하고 다시 훅을 향해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구조를 주로 취했던 엔플라잉 노래들과는 달리, 밀도를 균일하게 유지하되 랩과 노래 스타일을 틈틈이 바꿔 따분함을 차단한다. 한 밴드의 프론트 퍼슨이자 래퍼라는 정체성이 중첩된 위치에서 이승협은 메스꺼운 선입견을 다시 한번 산뜻하게 어긋 낸다.
주로 여성을 향한 부정적 편견을 담은 단어로 쓰여온 ‘꼬리’를 성적 긴장감과 유희의 은유로 사용하며 자연스레 의미를 전복시키는 가사가 흥미롭다. 비슷한 맥락에서 ‘날라리’의 연장선에 있는 시도처럼 보이는데, 선미가 참여한 가사는 늘 테마가 뚜렷하면서도 사고의 과정을 되짚어보고 싶게 만드는 디테일이 있다.
선미의 곡들이 언제나 그랬듯 퍼포먼스와 합쳐지면서 그 의미가 강조되고 완성된다. 고양이부터 구미호까지 꼬리를 시각화한 안무는 뮤지컬의 한 막을 감상하듯 시선을 압도하며, 특히 삼백안마저 퍼포먼스의 일부로 만들어버리는 선미의 눈빛과 무대 연기력은 여태 보아온 케이팝의 그 어떤 공포 콘셉트보다 섬뜩한 순간이다.
겹박자 위에 뭉근하게 퍼지는 관능미는 선미의 솔로 데뷔곡 ‘24시간이 모자라’를 연상케 하나, 색감과 표정이 단적으로 대비되는 앨범 커버에서 드러나듯 그 태도는 정반대다. ‘24시간이 모자라’가 내내 숨이 가쁜 듯한 창법으로 어딘가 절박하고 위태로운 느낌을 냈다면, ‘꼬리’는 파트에 맞춰 목소리를 다채롭게 변환하며 여유롭게 위험함을 연출한다. 음역이 높거나 성량이 압도적인, 흔히 말하는 ‘가창력 좋음’의 범주에 들지 않더라도 좋은 가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시라 할 수 있겠다. (1theK 채널에서 공개한 ‘꼬리’와 ‘꽃같네’의 라이브 영상을 필히 시청할 것을 권한다)
선미가 연출하는 위험함의 근저에는 EP “Warning”의 삼부작 (‘가시나’-‘주인공’-‘사이렌’) 때부터 굴려온 입체적인 퍼스널리티가 자리한다. 으레 자신의 솔직한 이면을 내보이거나 다양한 협업으로 자아탐구를 거치며 정다면체와도 같은 자아상을 구성하는 여타 셀프 프로듀싱 아이돌과 달리, 선미는 유독 전개도가 명징하게 떨어지지 않는 곡면 도형처럼 느껴진다. 오래간 호흡을 맞춘 FRANTS와의 작업을 중심으로 확고한 스타일을 유지하는 가운데, 저마다 복잡다단한 심상이 녹아있는 악곡, 가사, 안무, 뮤직비디오를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서 내놓기 때문이다. 요컨대 선미의 위험함의 실체는 곧 어디로 튈지 알 수 없고 곡면 너머를 쉽사리 가늠할 수 없는 구체(球體)의 예측불허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꼬리’는 선미표 '위험'의 정수를 보여준다. 앞서 이야기한 다채로운 보컬 운용은 물론, 통상의 뜻을 거부하고 겹겹의 함의를 덧댄 메타포가 인상적이었던 ‘가시나’, ‘Noir’ 때와 같이 ‘꼬리 치다’는 표현을 전유해 이를 동물적이고 솔직한 감정표현으로 해석해낸 작사가 돋보이며, 이는 캣우먼을 오마주한 뮤직비디오, 다양한 꼬리 모양을 형상화한 안무와 결합되어 더 큰 폭발력을 발휘한다. 레드벨벳 아이린&슬기 ‘Monster’의 안무가인 Janelle Ginestra를 직접 섭외해 만들었다는 퍼포먼스는 호기심에 찬 고양이의 꼬리, 좌중을 현혹하는 구미호의 꼬리, 날카롭게 곤두선 전갈의 꼬리를 넘나들며 기이한 인상을 남기는데, 결국 이를 완성하는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미의 표현력임을 짚어야 할 듯하다. 그 어떤 화려한 동작보다도 기억에 남는 것은 광기에 찬 헤드뱅잉, 그리고 섬뜩한 선미의 표정이었다. ‘가시나’의 엉뚱함, ‘주인공’의 파국, ‘사이렌’의 박력, ‘느와르’의 냉혈, ‘날라리’의 광란, ‘보랏빛밤’의 로맨스를 모두 종합해낸 선미의 요약본. 홍소진과 새로이 합을 맞춘 사이드 트랙 '꽃같네' 역시 '가시나'와 'Black Pearl'의 스핀오프로 느껴져 선미가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집대성해가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여성을 고양이에 비유하는 것은 아주 오래된 관습이고, 성적인 비하의 의미로 관용될 때도 상당히 잦은 편이다. 그러나 '가시나'와 마찬가지로 선미는 가장 강렬한 여성의 이미지로서 고양이를 전유한다. 무표정으로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며 이어가는 연기는 야생 동물의 모습에 가까운데, 집고양이뿐만 아니라 고양잇과 맹수의 모습까지 언뜻 볼 수 있어 더 에너제틱하게 다가온다. 여느 때보다 낮고 거칠게 들리는 보컬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고양이의 울음소리와 대조적이라서 더욱 몸집이 큰 고양이를 떠올리게 한다. 퍼포머의 존재감이란 그런 것이다.
첫 정규앨범 “ONF: MY NAME”의 타이틀. 곡을 여는 힘찬 브라스 소리 의성어 'Brrram 빠밤 빠밤 빰빰' 후렴은 노래의 시작이기도, 앨범의 시작이기도, 또 정규 앨범으로 수렴되는 지금까지의 온앤오프 음악의 확언이기도 하다. 노래하고 공연하는 사람들로서 이 시국에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겠지만서도, 온앤오프는 이번에도 힘차고 맑은 청춘찬가로 세상에 나섰다. 그 자체가 주는 뭉클함이 있다.
이제껏 온앤오프가 꾸준히 선보여온 '청량' 계열 케이팝은 세계 팝 역사의 맥락 상 나이 어린 여성층에게 사랑 받는 예쁜 음악, 일명 '버블검 팝'과 큰 연관이 있다. 국내에도 '청량'한 가요는 커리어 초반에 소년미를 어필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퍼져있었다. (일명 '남자다운' 모습을 보이려면 그만 둬야할, 오래 할 장르는 아니라는 인식도 내포되어 있었으리라.) 그러나 온앤오프는 드물게 계속해서 청량하고 낭만적인 노래를 발표하고 있는 팀이다. 이것도 일종의 뚝심이라 평하고 싶다. 이런 음악을 반가워하고 지지하는 케이팝 리스너들에게 지키는 의리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전형적인 아이돌 그룹이라기보다는, 마치 2000년대의 스윗소로우처럼 멤버들의 보이스톤이 다채로우면서도 잘 어우러지는 보컬 그룹으로의 특성이 강한 팀이다 (근데 이제 박진감있는 춤 실력을 곁들인). 브릿지 다음에 오는 주제의 반복을 과감하게 아카펠라로 편곡한 데에서 이 팀이 보여줄 수 있는 실력적 자신감이 엿보인다. 지속적으로 함께 작업해온 프로듀서인 모노트리의 황현과의 신뢰 관계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사가 전달하는 메시지도 빼놓을 수 없겠다. 요즘 나오는 다양한 가요가 저마다의 방법으로 청자들을 위로하고자 할 때 온앤오프가 접근한 주제는 '자기결정권'이다. 온앤오프의 SF 세계관 속에서는 마침내 도래한 안드로이드들의 해방가를 의미하지만, 그 울림은 청자가 노래 밖에서 따라부를때 더욱 선명해진다. 특히 곡 말미에 같은 멜로디를 반복하며 단 한 번만 등장하는 다음의 가사는, 전지구적 어려움을 거치며 존재를 의심 받고 지워짐 당한 사람들에게 멋진 응원가가 되어준다. "살아있다 우린, 꿈을 꾼다 우린 / 아름다운 우리 여기에 있다."
픽시는 으레 떠올리는 요정의 이미지가 아닌 (레인보우 픽시를 기억해보라) 원전이 되는 잉글랜드 남서부 설화 속 픽시의 이미지를 따온다. 여행자를 놀래켜 겁을 주거나 길을 잃도록 만드는 짓궂은 픽시처럼 ‘Wings’는 시청각적으로 착란을 일으키는 데에 열중한다. 돌연 귓가를 파고드는 인트로의 조잘거림을 뿌리치면 단호하게 찍어내리는 비트가 귀를 난도질하고, 픽시를 묘사한 옛 삽화처럼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곡을 휘감는다. 드림캐쳐의 데뷔 초기 방향성을 블랙핑크와 에버글로우의 방법론으로 풀어낸 듯 보이는데, 아니나 다를까 해외 케이팝 팬덤에서 조금씩 반응을 얻고 있다. 후렴구에 삽입된 비명 소리, 엑소시즘을 보는 듯한 기괴한 동작들 등, 호불호가 갈릴 만한 요소들이 삐걱거리고 있으나, 다소 조악(粗惡)한 구석마저도 그룹의 콘셉트에 맞추어 조악(刁惡)하게 풀어진 듯하다. 자칫 우스워지기 쉬운 콘셉트를 착실하게 수행해낸 멤버들의 역량도 주목할 만하다. 폭주하는 빌드업 끝에 맞닥뜨리는 구호 “We’re the PIXY!”의 해괴한 쾌감 하나만으로 신인으로서 신선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앞으로 콘셉트의 줄다리기를 어떻게 해나갈지가 관건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