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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이 페미니즘 책을 읽어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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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kimjiyoung

저는 모 학교 도서관의 사서입니다. 말이 도서관이지 사실상 도서실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단출한 공간을 담당하고 있지만, 그래도 (교사가 아니더라도) 전문 사서를 두고 있는 곳은 사정이 좀 나은 축에 속합니다. 그마저도 형편이 안 되면 국어 담당 교사가 도서관 관리를 겸업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고 하니까요. 참고로 2016년 기준, 도서실/관을 보유한 초중고 학교의 비율은 거의 100%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2010년만 해도 30%도 채 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괄목할 만한 변화인 것은 확실하지요.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이 채 지났을까, 이 자그마한 도서관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의 대출 빈도가 전에 없이 급상승한 것이었어요. 원인은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명확했습니다. 레드벨벳의 멤버 아이린 씨가 팬미팅 현장에서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언급한 일이었지요. 그 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주지의 사실일 것이므로 말을 아끼도록 하겠습니다만, 아무튼 일선에 있는 처지인지라 그 반응을 아주 뜨겁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가에 비치된 장서는 물론, 여분의 복본까지 그야말로 불티나게 빌려 가더군요. 학생이 먼저 와서 “〈82년생 김지영〉 있어요?”라고 물어보는 일도 흔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교사들을 중심으로 대출 빈도가 꽤 높은 인기 서적이긴 했습니다만, 어린 학생들에게서 그런 반응을 이끌어낸 것은 아이린 씨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팬미팅 현장에서 요즘 읽은 책을 질문 받는 아이린 | 〈레벨업 프로젝트〉 캡처

팬미팅 현장에서 요즘 읽은 책을 질문 받는 아이린 | 〈레벨업 프로젝트〉 캡처

반응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페미니즘 도서를 더 읽고 싶다는 학생들이 늘어났습니다. 특히 여학생들이 먼저 찾아와 관련 도서를 추천해 달라고 하는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 너무 신나고 좋은 나머지 눈물까지 글썽여가며 추천 도서 목록을 작성한 적도 있어요. 생각보다 페미니즘, 그리고 여성학 관련 도서가 서가에 많았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고 내심 부끄러웠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그 학생들이 없었다면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거예요.

한 여성 아이돌이 페미니즘 관련 서적을 읽었다고 언급한 뒤, 불과 몇 주간에 걸쳐 나타난 변화가 이 정도였습니다. 듣기로는 아이린 씨의 언급 후 〈82년생 김지영〉의 매출이 무려 104% 증가했다고 하니, 모르긴 몰라도 많은 사람이 아이린 씨 때문에 이 도서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봐야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이돌을 동경하는 학생들(레드벨벳은 ‘여덕’이 유독 많은 그룹으로도 알려져 있지요)도, 당연히 그 대상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 나도 읽어볼까?’라는 가벼운 호기심이든, 좀 더 진중한 형태의 탐구심이든, 어떠한 유형이라고 해도 해당 서적에 대한 관심은 그 자체로 유의미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이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고요.

여기서 페미니즘을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굳이 설파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아이돌이 페미니즘을 해야 하는 이유’라면, 바로 이것이 그 이유라 답하겠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어린 학생들은 동경하는 대상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갖습니다. 유명 보이그룹이 뮤직비디오에서 소품으로 썼다는 이유로 해당 서적이 품절되는 현상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읽었다’는 언급만으로 많은 학생들이 같은 책을 읽어보고 싶어 하고, 더 나아가 관련 도서를 찾아 읽는 이 현상은 특히 이 학생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분명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슬픈 사실입니다만, 저 같은 사서가 백 번을 추천하는 것보다 아이돌이나 유명 인사가 읽었다고 언급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파급력이 크기도 하니 말이지요. 그래서 사실은 그런 유명인들이 더 많은 목소리를 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만, 이는 조금 잔인한 부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린 씨가 그 후에 겪은 일을 생각하면 더더욱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목소리가 꺾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역시 간절하지만요.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민음사

이러한 관심을 지속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일선의 노력 역시 따라야만 합니다. 적어도 구매 요청을 사서의 개인적인 판단으로 거부하거나, 학부모가 나서서 반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관심을 유도하지는 못할망정, 부러 흥미를 꺾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누구도, 그것이 어떠한 분야가 되었든,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고자 하는 의지를 꺾을 권리가 없습니다. 꺾는다고 끝날 일도 아닙니다. 이러한 흐름과 변화는 이미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어가고 있고, 어린 학생들이라고 그 예외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초중고 학교 도서관은 물론, 대학교와 지자체 도서관들 역시 더 많은 페미니즘 및 여성학 서적을 구매하고 구비하여 이러한 수요에 맞출 의무가 있습니다. 흔한 말로 도서관은 지식의 보고이며, 청소년기에 접하는 책 한 권은 인생을 좌우할 정도로 큰 영향을 미치니 말이지요. 적어도 그들에게 기회는 주어야 옳지 않을까요.

생각해보니 제가 사서가 된 이유도 그것이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책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책 한 권의 가능성을 믿고 이 직업을 지망한 것이었어요. 저는 이곳에서, 제 나름의 전장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니, 바라건대 더 많은 ‘91년생 배주현(아이린의 본명)’이 페미니즘 책을 읽고 그 경험을 세상과 공유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을 우러러보는 많은 이들이 호기심으로라도 그 책을 손에 쥐길 바랍니다. 그들이 새로운 세상과 조우하길 바랍니다. 나아가 이 세상을 조금씩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 가길 바랍니다. 책은, 분명 그런 힘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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